생명의말씀

福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5-02 15:47
조회
43


가. 머리글


한국 기독교 신앙의 두드러진 생태를 하나 꼽는다면, 신자들의 ‘축복’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를 지적할 수 있겠다. 인간은 누구나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본능적인 욕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육체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하며 살아야 할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 여년전만 해도 교회지도자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가난을 미덕처럼 강조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후 소위 성령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운동이 가열되면서, 지도자들의 의식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이제는 돈 잘 벌어 부자로 잘 사는 신자만이 ‘복’을 받은 자이고, 그와는 반대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신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극단적인 관념을 주입시켜 왔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이론들은 60 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과 더불어 아무런 부담이나 커다란 자극없이 순박한 신자 대중에게 잘 받아 들여졌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잘 믿고, 충성봉사하며, 소득의 십일조 헌금을 잘 내는 자라야 사업이 잘 되서 부자도 되고, 자녀들도 성공하며, 육신의 건강도 누리면서, 복을 받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는 관념이 대부분의 신자들의 머리 속에 완전히 고정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고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잘못된 불충스러운 행동때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심한 정신적 질환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신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금도 광신적인 신앙생활의 늪에서 허위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연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올바른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나. 복의 정의


원래 ‘복’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아쉬레’라는 말인데 이것을 70 인역에서는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영어에서는 ‘행복한(happy)' 또는 ’복있는(blessed)'아란 말로 구별없이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복’이란 말은 동양적 관념으로는 운명론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특히 동양인들이 잘 사용하고 있는 ‘운수’라든가 ‘행운’이라든가 하는 용어들이 모두 ‘복’이라는 관념을 부여하여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운명론적임을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복’을 인과응보의 관념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측면도 있는데, 그것은 ‘복’을 인간 자신의 선한 행위의 공덕에 대한 보상물로 보는 견해였다.



서양에서도 ‘복’이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라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적인 ‘복’이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밝혀 주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항에서 차례로 밝혀보기로 하겠다.



다. 복의 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된 인간에게 베푸시는 ‘복’을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중 하나는 일반은총에 속한 복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은총에 속한 복이다.


이들 구분은 상대적이라기 보다는 종속적인 구분으로써 일반은총에 속한 복은 어디까지나 특별은총에 속한 복을 보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먼저, 일반은총에 속한 복


이 복은 택자나 불택자, 또는 신자나 불신자, 그리고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게 구별없이 그 뜻을 따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세적이고 육체적이며 일반적이기 때문에 신자들만 현세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며, 자연 만물의 아름다운 혜택도 신,불신간에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고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하게 사는 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께 무슨 연고냐고 질문한 일이 있다.(렘 12:1 참조)


일찌기 철인 니체도 악인들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고 도리어 승하고 잘 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던 나머지,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신신학(死神神學)의 원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우매를 범한 원인은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에 속한 복을 어느 누구에게나 구별없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특별은총에 속한 복


이 복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성도에게만 기쁘신 뜻을 따라 베풀어 주시는 특별은총의 선물을 말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세적이고 신령적이며 특수적이기 때문에 신자나 불신자가 구별없이 받는 것이 아니고, 택함받은 자만이 받아 누리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적 ‘복’은 바로 이같은 특별은총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참조 엡 1:3-6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복(福)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擇)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도 맞고, 굶주리기도 하고, 헐벗기도 하고, 감옥에 갖히기도 하였으나, 잠시 잠간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하면서 감옥 안에서도 심령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택함 받은 성도에게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에 속한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 복의 특성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특별은총에 속한 복은


주권성, 언약성, 은혜성, 영원성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주권성


성경적인 복은 인간 편에서의 필요에 따른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혹자들은 복을 빌 수있는 권한이 특정한 교회 직분자에게만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으나, 축복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나 사도들은 어디까지나 약속된 복을 구했을 뿐이지, 자신들의 권한으로 복을 빈 것은 아니다.


2. 언약성


성경적인 복은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말한다.


‘언약’이란, 베풀어주실 복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주시기로 작정해 놓으신 복, 즉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요, 축복이다. 즉 복을 비는 것이다.


따라서 축복은 기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종교나 무속신앙자들처럼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의 욕심대로 소원성취를 비는 불공이나 염불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 6:31-33)


3. 은혜성


이방종교나 무속신앙자들은 인과응보의 관념에 의하여, 선한 행동의 인간 공덕에 따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복은 인간의 행동과 관계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성을 포함하고 있다.


혹자들은 바울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 말한 성구(고후 9:7)를 근거해서 성도가 누릴 복이 마치 행위의 댓가대로 주어지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 성구는 바울이 신령한 것으로 심고, 육신의 것으로 거두는 일(고후 9:11) 즉 신령한 복음을 전하고 물질적 연보를 하게 하는 일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뜻에서 언급한 것이다.(참고 갈 6:6-9)


따라서 성경적인 복은 행위의 댓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4. 영원성


일반은총에 속한 복은 현세적이고 육체적이기 때문에 영원성이 있을 수 없으나, 특별은총에 속한 복은 영원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가 받은 복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언급했다.(엡 1:3-6) 이 신령한 복은 성도가 영원한 세계에서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특별은총에 속한 복을 가르치는 말이다. 물론 현세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리기도 하지만 영원한 세계에서 완전하게 누릴 수 있는 복을 말한다. 솔로몬은 현세의 복이 영원하지 못한 것을 전도서에서 잘 말해 주고 있다.



마. 복의 내용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처음으로 베풀어 주신 복이 있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과 땅을 정복하라는 것과 만물을 다스리는 것들이었다.(창 1:28)


이같은 복은 아담의 후손인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도 한결같이 주어진 것이다.


1.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이 복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번창을 약속해 주신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서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자손을 많이 번성케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창 22:17)


구약에서의 이같은 복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의 자손으로 오셔서 택한 자들을 예수의 씨로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번창케 하실 신령한 복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였다.(참조 갈 3:29)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육신적인 혈육의 자손이 번창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천국 백성의 번창을 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땅을 정복하는 복


백성이 많아지면 당연히 국토의 필요성이 따른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하심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지시할 땅으로 가서 그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1,7)


구약에 있어서의 이같은 복은 물론 지상적이고 현세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의 자손으로 오셔서 온전한 것으로 이루실 것에 대한 하나의그림자요, 예표였다.


따라서 이같은 복도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방인들에게 빼앗길 염려나, 엉겅퀴와 질려가 자라는 저주받은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받은 백성이 들어갈 하늘에 속한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알 수가 있다.(계 21:1)


3. 다스리게 하는 복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백성이 있고 국토가 있으면, 국권의 필요성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라 하심같이, 아브라함에게도 후손에게서 열왕이 일어나 다스리게 하신다는 통치의 복을 약속하셨다.


구약에 있어서 이같은 복 역시 지상적이고 현세적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약속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것으로 이루실 것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요 예표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것은 장차 세워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만왕의 왕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뜻하신 것임을 알 수가 있다.(요 18:36)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복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 요약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백성과 국토와 국권을 복으로 약속하시고 약속따라 복을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지엽적인 복의 내용들은 모두가 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복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써,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세워지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자와 예표에 불과한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신약교회가, 구약적인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복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세적이고 신령한 것들로 승화시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논리는 성경 해석학적 입장에서 너무 분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적인 福이란 일반은총에 속한 것이 아니고 특별은총에 속한 것이며, 


현세적 지상적이 아니라, 내세적이고 신령적인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세우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로고스 신학연구원 원장 박용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