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cms)한경직목사 (2)_기독교와 정치

작성자
itmedia
작성일
2012-12-10 06:59
조회
57


기독교와 정치(로마서 十三-)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十三?)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十四?三十四)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二十二?二十一)



 



이 말씀은 우리 기독신자에게 국가에 대한, 권세에 대한, 정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준 말씀입니다. 우리가 三十여 년간을 일본의 포악한 정치 밑에 종이 되었을 때에는 정치는 우리가 운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지만, 해방된 오늘날 나라를 다시 찾아 나라의 주인공이 된 우리로서는 누구나 다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의 흥륭(興隆)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의 국민이 된 우리 기독교도들은 하늘 나라와 이 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우리 신도로서 이 나라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기독교의 정치 철학을 간단히 소개하고 다음에 실제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二十여 억이라는 인류가 생을 영위하고 있는데 각각 국가를 형성하고 있어서 방금 UN에 가입된 국가만 해도 五十여 국가나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국가가 우리 인간 생활에 필요하냐 필요치 아니하냐에 대해서 계몽 철학과 十九세기의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은 무정부주의자 프루돈과 크로포트킨 등은 국가의 필요성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존 사회의 모든 해악의 원인을 국가의 강제 권력에 있다고 하여 이러한 강제 권력을 배제한다면 본래 인간성은 선한 까닭에 본래의 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네들은 강제가 악을 낳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나머지 모든 인간성을 미화한 데 오산(誤算)이 있었습니다. 악은 먼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만약 이 악이 없으면 무정부주의의 실현이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면 정부는 필요치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우리의 이상이요 현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성경 말씀대로악을 행하는 자를 벌하기 위하여세운 것입니다. 즉 죄가 있으므로 관헌을 임명하여 인간 생활에 필요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제 권력 곧 주권의 소재를 어떠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제왕은 신을 대신하여 모든 권력을 가진다는 중세기의 제왕신성설(帝王神聖說)이 있고, 국가적 자아 의식 의지를 주창하는 독일 철학에 의한 범신론적(汎神論的) 국가 주권 설이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 주권 설을 보게 되었습니다. 十八세기에 인민 주권으로 공화국을 세운 나라로는 一七七六년에 독립한 미국과 一七八九년에 이루어진 불란서 공화국 두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인민 주권이지만 불란서는 무신론적 인민 주권이었으므로 테러의 성행, ()혁명 운동의 봉기, 나폴레옹 제국의 건설, 왕정의 복구, 나폴레옹 세의 제국 재건 등으로 十九세기 중 불란서는 가장 수난한 민족이었습니다.



 



그 간에 단두대에 아침 이슬로 사라진 청년의 수가 그 얼마이었습니까? 반면에 미국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의한 국가로서 그 헌법에감사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관헌을 택하는 권()을 주셨도다라고 하였고 그 독립 선언서에는아메리카 국민은 자연법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그 권리를 주창하고 버릴 수 없는 권리는 창조주인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고로 일어나노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미국은 건국이래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제일 축복 받는 평화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권의 근본은 다 신에게 있다는 것의 증좌(證左)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 권세를 얻었든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그 권세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일꾼 됨을(十三?) 기억하여야 합니다. 고래로 모든 위대한 정치가는 다윗 이래로 글래드스톤, 링컨까지 이런 의식을 가지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만약 이 책임을 잘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옮기시기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십니다. 고로 모든 정치가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벨사살 왕이 그 관원 천 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배설하고 술을 마시며 금, , , , 목석으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할 때에 돌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쓴 것을 당시의 참된 정치가 다니엘에게 물었을 때, 다니엘은 담대히 그리고 서슴지 않고 왕 앞에서와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과 존귀를 왕의 조부 느부갓네살에게 주셨으니 그 주신 권세를 인하여 모든 백성과 나라와 각 방언 하는 자들이 그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저가 임의로 죽이고 살리며 임의로 높이고 낮추더니 저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니 왕위를 폐하고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 그 마음이 변하여 야수(野獸)의 마음과 같아지고 또한 들 나귀와 동거하고 또 소와 같이 풀을 먹고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의 나라를 주관하시고 또한 그 뜻대로 나라를 사람에게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하셨으니 벨사살 왕이여, 왕은 그의 손자가 되어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겸비하지 아니하고 오직 스스로 높여 하늘의 대 주재를 거역하고 우리가 그 성전 기명을 왕 앞에 가져다가 왕과 관원들과 왕후와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또한 금, , ,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 곧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를 찬양하고 도리어 생명 호흡을 주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이에 하나님이 손가락을 보내 사 이 글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그 글은 이것이니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하였으니 그 뜻을 해석하건대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마치게 함이요데겔은 하나님이 왕을 달아보사 부족하다 하심이요베레는 하나님이 왕의 나라는 나누어메데파사사람에게 주었다 하심이라고 사실대로 조금도 숨김없이 말하였고 또 사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는 다니엘의 정치 철학인 동시에 우리 성경이 국가 주권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패망 당한 일본을 보세요. 주권의 근본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자들의 말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대저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자연계에 자연 법칙을 주셨으며 도덕 계에는 도덕적 법칙을 주시듯 이 정치에도 일관한 원리를 주셔서 그 원리에 의하여 정부를 세워 모든 백성으로 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라는 말씀과 같이 의를 정치의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국가 내에도 개인 개인간의 관계가 있고 계급과 계급과의 관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과의 관계가 있는데 이러한 중에 있어 인간의 인격을 성장시킴에 절대 필요한 자유와 평등을 q장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꼭 공의로 정치를 실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정치를 실행하는 사람에게 칼 곧 권세를 주신 것은 악한 사람을 징계하라고 형별의 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칼을 이러한 데는 쓰지 않고, 오히려 선한 사람을 핍박하고 선지자를 죽이고 주기철(朱基徹)목사 같은 이를 옥사케 하면 이는 법대로 쓰는 공의가 아닙니다. 의인이 피를 흘리고 옥중에서 죽게 하는 이러한 정치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칼은 시비를 온전히 분간하여 민사 소송 등에 있어서 공의로 판단하여 지도하라고 주셨거늘, 공평이 없고 안면과 지위와 뇌물로 허가를 주고 안 주며 매관매직을 한다면 어찌 이를 공의라 하겠습니까? 또한 이 칼은 외적의 침입 시에 방비하라고 주셨는데 육 해군과 공군을 가지지 아니한 약소국가를 침략하고 모략하고 자기의 야심과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약소민족을 유린하면 어찌 이것이 공의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관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마땅히 스스로 씻어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의 악한 일을 버리며 행악(行惡)을 그치고 선생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여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十六-十七)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너희의 공의는 물 흐르는 것 같이 하고 의는 큰 강 같이 할지니라(?二十四)고 하셨고, 사람아, 주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 네게 청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의를 행하며 긍휼히 여기기를 좋아하고 겸손으로 네 하나님께 행함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으로 국가의 필요성과 주권의 소재와 정치 원리에 대하여 대략 말씀을 드렸는데 이제부터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종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중세기를 보면 교회가 정치를 지배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교회에 예속되었던 것입니다. 十一세기에 독일 황제 하인리히가 알프스 산을 넘어 법황이 유하는 카노사 성밖에서 맨발로 눈 위에서 일 간을 빌어서야 비로소 받았다는 사실은 국가가 교회의 구속 아래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은 종교 개혁 이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로는 콘스탄틴 이후의 국가와 교회의 관계인데, 이 때에는 국교가 설립되어 현재가지도 독일(전쟁 전), 스웨덴, 노르웨이 제국은 국교를 가지고 영국도 성공회를 국교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교 관계에 있어서는 좋은 점도 물론 있으나, 세속의 권세가 교회를 간섭하는 정치적 모략이 있기 쉬운, 원만치 못한 점도 있습니다.



 



셋째로는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하는 미국과 화란 같은 칼빈주의 제국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완전 분리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훈에도 적합하며 따라서 교회는 영적 범위 안에서 완전 자유일 것이며 간접적으로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 신자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분리해야만 되겠지만 개인은 신자인 동시에 또한 국민인 고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 나갈 때 신자는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로 우리는 주군이 하나님께 있는 줄 알아 영광을 돌리는 경건한 명령에 순복하는 나라를 만들 의무가 있으며, 둘째로 공의에 기()하여 기독교의 국가적 이상인 자유, 평등, 박애가 실현되는 국가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직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十八세기에 북미 대륙의 청교도들은 독립 전쟁을 하여 아메리카 독립을 완성했고 十七세기 화란인은 스페인과 용감히 싸워 독립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면 특히 이 시대에 처한 우리들은 국가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 대한은 아직까지 완전한 독립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기회에 독립을 완수할 책임이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가 없이는 신앙의 자유와 기타 모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고로 우선 독립입니다. 이것은 우리 겨레의 지상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은 하되 기독교적 이상에 의하여 건국케 할 의무가 있습니다. 건국을 하되 유물론적 독재 국이 되면 어찌하겠습니까? 지금은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행동 여하가 자손 만대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여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가 어떻게 이 천부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까? 최선의 의무 이행의 방법은 여하한 것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조선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참으로 지금은 각 방면이 혼돈한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그 근본 이유는 사상이 혼돈해진 까닭입니다.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독재주의냐, 기독교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건설이냐 파괴냐, 문명이냐 야만이냐-이러한 사상적 기로에서 청년과 학생과 노동자, 농민, 소시민, 일반 대중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어느 노선이 우리가 취할 진실한 노선인가를 알고자 대중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사명이 여기 있습니다. 천고에 빛나는 진리를 파악한 우리가 철저한 사상으로 교회 운동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잡지나 소책자를 발간함으로써,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다지도 퇴영적(退?的)입니까? 좀 더 주도성(主導性)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지고서 노동 운동도 좋고, 청치 운동도 좋습니다.



 



전후에 있어서 각국에는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세요. 일어나 일하세요.



 



어떤 친구가 일전에 내게 말하기를대한의 기독신자로서 정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하게 되면 으레 술과 담배를 먹게 된다도 합디다. 여러분, 대한에는 묵공(?公) 월리암과 워싱턴과 같은 기독교 애국자는 없겠습니까? 참 신앙을 가지고 정치 운동, 사회 운동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반 교우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전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전도는 최대의 정치 운동이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적 이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 전도 운동을 개시하여 전 대한 민족의 사상을 기독교 사상으로 순화(醇化)한다면 공의의 나라, 독립된 기독교 대한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1946년 날자미상·베다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