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cms)한경직목사 (6)_상부상조의 정신

작성자
itmedia
작성일
2012-12-12 07:04
조회
74


-6 상부상조의 정신  



 



(사도행전 二十三-三十七)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三十二)



 



이 말씀은 초대 교회 시대의 이야기로서 오순절 다락방에서 불같은 성신을 받았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말씀인 바, 그 때에 나타난 두 가지 현상을 보면 하나는 제자들이 다 성신의 충만함을 얻어 다른 나라 방언을 말하였고, 베드로와 같은 제자는 성신을 힘입어 하루에 천 명을 회개하게 하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의 현상은 믿는 무리가 모든 재산을 팔아 유무상통의 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둘째의 현상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의 공산주의라고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는 공산주의 즉 현대 마르크스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늘의 공산주의는 유물론적 철학을 기본으로 한 것이고 이 초대 교회의 현상은 신앙을 기본으로 한 것이니 전자는 강제적으로 되어지는 것이요, 후자는 자발적으로 자기의 것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다라서 오늘의 공산주의는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물욕과 탐심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초대 교회의 이 현상은 오로지 남에게 주려는 사랑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이 초대 교회에서 생긴 일은 일시적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우리 신자들은 이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정신이 교회 안에서 언제든지 흐르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니아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에 그들이 심히 어려운 환난과 가난한 중에서라도 구제하기를 힘썼다는 사실은 고린도 후서 절에저희가 환난 가운데서 시험을 많이 받을 때에 기쁜 마음이 더욱 많아 심히 가난하여도 구제하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였느니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회뿐만 아니라 온 사도 시대의 교회 현상을 보아도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잘난 사람은 그다지 없고 가난한 자, 노예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심히 어려운 중에서라도 그들은 기뻐하였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 그치지 않고 심한 압박이 있었건만 그들은 다른 어떤 계급의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구제를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이방 교회가 주후 四十六년부터 四十八년까지의 대 기근 때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였다는 기사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주후 , 세기의 교회의 현상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 시대에 보통 천 명 이상의 가난한 자, 병든 자, 과부와 고아들을 구호했으며 데시어스(Decius) 황제의 핍박 때 로마 군대가 교회의 보물을 탈취하려 왔을 적에[ 그 교회의 집사 로렌피어스는이것이 우리의 보물이라하면서 소경과 절름발이와 반신불수와 고아들을 구호하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합니다.



 



주후 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교인은 약 만 명 있었는 바 그들은 천의 불행한 자의 생활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또 후에 이 곳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인명이 손상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대에 이것이 기독신자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탓이라는 말이 돌아가 이 때문에 신자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이 병이 무서워 앓는 자와 죽은 자의 시체를 그냥 내버리고 도망했을 때에도 신자들은 결사적으로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어서 병자를 구호하며 시체를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도망했다고 다시 돌아온 자들이 기독신자들이 한 업적을 보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흑사병의 유행은 갤러스(Gallus) 황제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카테이지 교회는 사이프리안의 지도하게 그들을 간호했으며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유세비어스 당시에는 핍박이 너무 심하여 어떤 교우가 재산 몰수를 당하면 교우들이 서로 생활 책임을 졌고, 다른 데로 피신하여 가면 목사의 소개서 한 장으로 으레 그들의 생활 책임을 졌다고 합니다.



 



세기초의 신학자 터툴리안의 변증론(辨證論)의 일 절을 보면보라, 저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를! 저들은 이제 서로 죽기도 사양치 않는구나, 저들은 아내 외에는 무엇이나 공동으로 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불신자들이 경탄함을 말하였고, 그들은 또한 불신자들을 향하여당신들은 우리를 핍박하나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을 위 하여는 아무 것도 아니하나 당신들의 빈궁한 자는 우리가 구제하노라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 반대자 루시안(Lucian)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에는그들이 서로 어려운 중에도 상부상조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 그들의 첫 입법자(立法者)가 그들 머리에 그들은 서로 형제[라 하는 사상을 단단히 넣어주었다라고 말하였고, 또 로마의 울바너스 감독은로마 전국에 기독신자로서 걸식하는 자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경에 나타난 교훈을 문자 그대로 순종했던 까닭이었으니 그들의 구제 대상은 과부와 고아, 무산자, 병자, 나그네, 죄수, 핍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대하여 그들은 사랑으로써 상부상조의 정신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부상조에 대한 태도를 보아 간단히 말하자면 첫째로 참된 신앙의 자연적 발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대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대개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 사 오리로 하여금 저로 말미암아 살게 하셨느니라함을 그대로 행한 것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그들 가슴 가득 찼고 그 사랑은 이 상부상조의 생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상부상조의 생활을 자선(慈善)으로 생각지 않았고 따라서 이 후의 상이나 영광이나 명예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독 자는 다 한 지체요 형제라는 관념에서 마땅히 사랑하여야 하고 마땅히 돌아보아야 할 것을 하는 데 불과하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에서 한 것입니다.



 



() 프랜시스는 배고파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먹게 할 때그는 자기 것을 먹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 형제를 내실 때에 각기 먹을 것을 주었으니 가난한 자에게도 주시는 것이 정한 이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넉넉할 때 봉사에 사용함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모든 재산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쓰라고 맡겨둔 것에 지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세요, 부자는 홍포(紅袍)와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으로 지냈고, 거지 나사로는 온 몸에 헌데가 있어 괴로운 생활을 하며 주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후에 둘 다 죽어 부자는 음부(陰府)에 떨어져 무한한 고통을 받게 되고 나사로는 천사가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두고 영생복락(永生福樂)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얼른 볼 때에 대단히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부자는 별로 음행도 토색(討索)도 아니하였고 나사로를 능욕도 아니하였고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잘 살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초점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맡겨 두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쓸 것이라는데 있는 것입니다. 도와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보지 않는 까닭에 그런 형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볼 때 자기가 가진 재산은 하나님의 재산이요 나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으니 마땅히 나누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왜 주가가 지옥에 갔습니까? 이 의무를 이행치 않은 까닭입니다. 세계의 부자가 다 이 의무를 이행했던들 오늘의 포악한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러스킨(Ruskin)토지를 처음 사람이 없을 때 사게 샀다가 나중에 사람이 많아 토지 값이 오르면 그 굉장한 이익은 나중 온 사람들이 그저 준 것이니 마땅히 나중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혹 학교를 세우든지 자선사업을 하든지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였는데 참으로 탁견(卓見)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모리배여, 이 진리를 압니까? 피난민을 위하여 돈을 쓰는 것은 의무입니다. 자선이 아닙니다. 의무라는 것은 아니하면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가난한 자나 병자를 섬김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으로 이는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부인 집사들이 병자를 심방 할 때주님을 뵈러 갑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二十五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에서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이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함이다하셨고 제자들이 전도하려 나갈 때에 주님은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말씀하셨고 또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를 섬기는 것이 곧 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상부상조의 단체로 인정하였습니다. 교회의 첫 일곱 집사는 봉사를 위하여 선택되었던 것이요, 교회에서 하는 헌금은 본래 구제 목적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이레 중 첫 날 하는 헌금은 오직 구제 헌금이었고 오늘날 교회 재정을 위한 경상비 헌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와 제직(諸職)의 근본 사명도 오직 전도와 구제였습니다. , 대한 교회여! 초대 교회로 돌아갑시다.



 



초대 교회의 상부상조의 정신은 지금 어찌 되었습니까? 압록강의 물이 백두산에서 처음 흐를 때는 물이 수정 같이 맑고 깨끗하였으나 흘러 내려옴에 따라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내려오는 하수도 물과 먼지 등으로 점점 더러워져 신의주가지 오면 먹을 수 없는 탁수(濁水)가 되어 버립니다. 기독교가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처음 시작했을 때는 성신의 감동으로 아주 맑고 깨끗하였습니다. 진리도 사랑도 맑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하여 긴 시대를 흘러오는 동안에 이것저것이 섞여져서 주님의 사랑이, 상부상조의 정신이 얼마나 흐려졌습니까? 이제 우리는 근본 생명수에 돌아가 마음껏 마십시다. 그리고 금일의 교회를 다시 맑은 교회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같이 인위적으로 부득이한 나그네, 가난한 자, 핍박을 당하여 부모 처자를 잃은 불쌍한 자가 많이 생긴 때가 다시 어디 있으며 오늘날 같이 그리스도의 순애(純愛)의 발로인 상부상조의 정신이 요구되는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베다니 교회 교우들이 초대 교회로 다시 돌아가 깨끗한 생명수를 마시고 상부상조의 생활을 하지 않으렵니까? 물론 우리도 다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깊이 깊이 느끼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북한에서 와서 구급을 요하는 형제들을 어떻게 하든지 교회로서 구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온 이들은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하여 직업을 알선하고 주택을 알선해 주어야겠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굶어 죽을지라도 구제를 요구하지 않는 교우가 많은데 이들을 위해서는 그 친근한 친구들이 사정을 잘 알아서 개인적으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외손이 모르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 어려운 세대를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세요, 이런 떼에 기독신자들이 돈만 많이 모아서 무얼 하시렵니까? 서로 돕고 서로 붙들면 다 살고, 나 혼자만 살려고 하면 다 죽고 맙니다.



 



선다싱이 눈 쌓인 히말라야 높은 산맥을 넘을 때에 얼어죽어 가는 이를 업고 갔기에 둘이 다 살고 그저 지나간 이는 얼어죽었더라 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이 시대에 어떻든 피차에 도와서 살아간다면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슬픈 자와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사랑이 강제적인 어떤 사상보다 낫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십시다.



 



(1946년 3월 16일.베다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