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이어령 교수- "목마름, 욕망 자체가 삶이라는 거지"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2-07 14:18
조회
92

이어령 교수


목마름, 욕망 자체가 삶이라는 거지



이어령 교수의 밤은 짧다. 2017년 가을, 4기 암 선고를 받은 이후부터 그의 삶의 시계추는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은 점점 길어지고, 밤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남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안 순간, 숙제 속도가 빨라졌다. 그 스스로에게 부여한 무한 확장의 숙제들. “그걸 다 해결하려면 130년은 살아야 돼”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숙제들을 하나하나 해내느라 그의 하루는 점점 더 농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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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를 지난 1월 4일,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생각은 명료했고, 논리는 정연했으며, 발상의 전환으로 ‘아!’ 하는 지적 충격을 안긴 것도 여러 번이었다.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사그라지지 않는 지적 호기심이 낳은 ‘영원한 우물물의 욕망’에 대해 그는 쉼 없이 말을 이었다.

유튜브 채널 ‘셀레브’에서 선생님 인터뷰가 여전히 화제입니다. 조회 수 48만 6500여 회로 역대급이더군요. 선생님 영상의 인기 비결이 뭘까요.

“나는 글을 쓰거나 강연할 때 새로운 소리를 한 게 없어요. 셀레브 인터뷰의 골자는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잖아. 다 아는 이야기지. 한데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들만 해왔어요. 가령 ‘우리 집에 고양이와 개가 있습니다’ 하면 화제가 안 되니까 ‘우리 집엔 금송아지가 있어요’ 식의 이야기를 하려 하지. 나는 살아오면서 경천동지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데도 사람들이 못 본 체하고 지나치려 한 것을 정색하고 이야기하는 거지.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 공감을 해요. 아인슈타인의 E=mc² 같은 이야기에 40만 명 넘게 공감하겄어?”

‘다 아는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루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요.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잖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런데 ‘복이 뭐예요?’ 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뭔지는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새해만 되면 되풀이하다 보니 자동으로 말해버려요. 자기 머리로 생각해서 입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귀로 들어서 입으로 나오는 거지. 내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내 머리로 생각한다는 점일 거야.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최근 선생님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대상은 뭔가요.

“돼지야. 돼지의 특성을 사람들한테 말해보라고 하면 거의 다 ‘뚱뚱하다’고 하지. 그래서 살찐 사람을 ‘돼지 같다’고 하고. 과연 그럴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돼지의 특성은 뚱뚱한 게 아니라, 다리가 짧은 거야. 돼지처럼 다리 비율이 짧은 짐승이 또 어딨어요? 돼지에 대한 오해지. 또 있어. 새해가 되니 ‘60년 만에 황금돼지가 돌아왔다’고 떠들썩해. 이 표현이 참 답답해요. 우리는 60년 전과 똑같은 시각으로 돼지를 바라보고 있어요. 성장 속도가 빠르고 생식이 왕성하니 돼지가 풍요의 상징이라는 건데, 이건 농경시대의 패러다임이야. ‘돼지관’을 바꿔야 해요.”

황금돼지, 풍요돼지가 아니라면요.

“잘 봐요. 재밌는 이야기가 많아. 강남의 입시정보왕 엄마를 뭐라고 해요? 돼지엄마라고 하잖아. 이때의 돼지는 ‘정보돼지’야. 돼지는 냄새를 잘 맡아. 개보다 후각이 10배 민감하지. 그래서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는 땅속에 있는 송로버섯을 돼지가 찾아내. 그다음 생명화 시대의 돼지는 ‘바이오돼지’야. 돼지는 장기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 특성이 인간과 가장 비슷해. 그런가 하면 ‘소통돼지’이기도 하지. 요즘 반려동물로 돼지를 키우는 사람이 늘고 있잖아. 살도 몽글몽글하고 보기보다 머리가 좋아서 웬만한 개보다 지능이 높아요.”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는 말씀이신데, 그런 열정을 잃은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노력해도 기회가 오지 않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요.


“일자리는 없어. 하지만 자기가 만들 수 있어요. BTS(방탄소년단)를 봐요. 오프라인 소속사에 가려면 기회가 적겠지만, 온라인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지지. 온라인에는 멀고 가까운 게 없으니 남미까지 1초 만에 갈 수도 있고, 돈도 안 들잖아.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일자리를 만든 거지.”

기존 패러다임으로 일자리를 찾지 마라?

“그렇지. 황금돼지, 풍요돼지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일자리 만원이지만,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져요. 이미 있는 단 하나의 의자에 앉으려 하면 서로 앉으려 밀쳐내고 싸우지만,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 되면 어때요? 내가 만들어 내가 앉으니 확실하지. 우물물을 마시려 하지 말고, 우물물을 파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목마른 갈증을 가지고 새 우물을 파라는 거지. 지적 상상력이나 엄청난 아이디어는 20대가 절정이야.”

선생님의 경우는 다른 것 같습니다. 지금도 창조적 상상력이 여전하시죠.
방대한 독서와 사색이 이를 가능케 했을까요?


“그런데 덮어놓고 천 권의 책을 읽는 사람과는 다르지. 산 전체를 뒤진다고 다이아몬드가 나와요? 어디를 파야 광맥이 있는지를 아는 거야. 인문학자인데 돼지를 왜 찾아 봤겄어? 12지 연구를 왜 했으며, 젓가락, 가위바위보, 보자기 문명을 왜 연구했겄어? 나의 창조적 상상력은 다독에서 비롯됐다기보다 지적 호기심에서 나온 거예요.”

지적 호기심은 선천적인 것 아닌가요?

“선천적이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다 있는 거지. 내 특징은 유년 시절의 상상력과 호기심, 반짝이는 어린아이의 눈동자를 지금까지 잃지 않았다는 거예요. 젊은이들도 어린아이의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일터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일터를 만들고 인생을 바깥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면 해요.”

요즘 새롭게 파기 시작한 우물이 있는지요.

“있어요. 최근 40권짜리 《한국인 이야기》 작업을 거의 끝냈는데, ‘탄생’에 대해 파고 있어요. 김 편집장은 몇 살 때까지 기억해?”

사진의 기억인지 확실치 않지만 5~6살 정도까지인 듯합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안 살았구만.”

하하. 기억에는 없어요.

“그러면 어머니 태 안에 있을 때 기억나요?”

당연히 안 납니다.

“답답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태어났을까? 어머니 뱃속에는 학원도 없고, 태아는 언어도 모르는데 어떻게 9개월이 됐는지 알고 10개월째 나갔을까? 도대체 그게 뭘까? 나는 그게 궁금하거든. 탄생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근원을 알고 싶은 거지.”

그래서 ‘세 살 마을’을 만드시고, 새천년준비위원장 시절엔 ‘밀레니엄 베이비’를 생중계하신 거군요. 88올림픽 ‘굴렁쇠 소년’도 결국 아이의 시선이고요.

“맞아. 그건 우연이 아니에요. 일관해서 흐르는 나의 호기심의 근원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태어났나’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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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대화하다 보면 종종 어린아이의 눈빛을 봅니다. 궁금해서 죽겠다는 어린아이의 눈빛. 신체나이는 87세신데, 스스로 생각하는 마음의 나이는 몇 살이신가요.

“나는 나이를 생각해본 적 없어요.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 양력 나이와 음력 나이가 다 다르다 보니 막 헷갈리거든. 이름도 그래요. 어렸을 때는 ‘으영’이었어. ‘어’자를 서울 근교에서는 ‘으’로 발음했거든. 그러더니 표기할 때는 ‘어녕’이가 됐어. 이화여대 시절에도 ‘이어녕 교수’로 불렸지. 한데 교육부 교과서에는 ‘어령’으로 표기돼 있어요. ‘영’자를 ‘령’으로 속음화해서 읽었거든. 나는 지금도 내 이름이 으영인지, 어녕인지, 어령인지 모르겠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는 성별, 연령, 이름이잖아. 내 성별이 남자라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연령과 이름이 애매한 거야.”

그러면 선생님은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으셨나요.

“생각. 내 생각에서 찾아야지. 허허.”

질문을 바꿔볼까요. 세상 모든 아이는 지적 호기심이 있지만, 어른이 되면서 이 호기심을 잃어버린다고 하셨지요. 호기심으로 본 선생님의 나이는 몇 살 정도일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점에서 정지된 것 같아요. 12~13세 정도. 그때 인생관도 바뀌고, 혼자라는 걸 알게 되고, 남에게 의존하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지. 소아마비에 걸리면 다리 하나가 자라지 않듯, 그때 멈춰서 어린아이의 눈으로 죽 살아온 것 같아요. 이중 구조가 생긴 거지. 문학이나 예술을 말할 때는 어린 시절의 호기심에 빛나는 내가 있어. 사물마다 경이롭고, 나비마다 다르게 날고, 꽃들마다 환희에 차 있는. 이게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타우마젠(Thaumazen)’이지. 타우마젠을 얻는 게 최고의 즐거움이에요. 책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걸 발견하면 판단 정지가 되면서 ‘억!’ 하고 덮어버리지.”

눈을 더 크게 뜨고 읽는 게 아니라, 덮어버리신다고요?

“너무 놀라서. 그 감동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지. 첫눈에 반한 기막힌 여성이나 남성을 만나면 온몸이 굳어버리잖아. 그런 순간이 있는 거야. 숨도 못 쉬고, 걷지도 못 하고, 얼어버리는. 그 순간은 기쁨인 동시에 공포이기도 해요. 호랑이를 만나서 도망가는 건 덜 공포스러운 거야. 정말 무서우면 움직여지지 않지.”

그런 엄청난 지적 환희의 순간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아직 못 만났지. 그냥 덮는 정도는 만났지만.”

이중 구조에서 나머지 하나의 아이덴티티는 뭔가요.

“남편, 아버지, 교수, 위원장, 장관 같은 것이지. 이런 사회적 자아로 살아가려면 권위도 가지려 하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해야 하지. 어린아이 같은 나도 있고, 이런 나도 있어요.”

암 4기 선고를 받은 후 달라지신 게 있다면요.

“이 유리컵을 앞으로 얼마 이상은 못 쓰게 된다면 어떨까? 모셔둘까? 한 번이라도 더 쓰겠지. 같은 식이에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더 치열하게 살게 돼요.”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나는 그런 게 없어. 버킷리스트가 생기면 바로 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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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브 영상에서는 평생 읽고 써온 외길 인생을 회고하시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내비치셨는데요.

“그건 후회와는 달라요. ‘다른 길로 가면 또 다른 삶이 있었을 텐데’ 하는 호기심이지. 나는 내 세계가 우주이고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이 길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다른 좋은 길은 없었을까? 하는 무한한 욕망이지.”

육체의 나이가 연장되어 200년까지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더 하실 건가요.

“200년을 살든, 10년을 살든, 하루를 살든 질(質)로 생각해요. 200년은 200년의 하루가 있는 것이지, 200년의 시간이 있는 게 아니야. 오늘 하루,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 끝없이 시간이 스쳐가는 한순간을 살아가는 데 진력할 뿐이에요.”

미루기는 안 하시나요.

“허허. 왜 안 하겄어. 중요한 일은 나도 ‘내일 하자’고 해요. 직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툭하면 ‘주말에 할게’ 해. 인간은 시간에 인위적인 칸막이를 해서 주말과 주초를 만들어요. 관습화된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 모어 댄(more than)과 모어 레스(more less)가 있을 뿐. 그러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시간이 끝없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중요한 걸 내일로 미루는 거야.”

중요한 걸 먼저 하시는 게 아니고요?

“그게 내가 종종 말하는 해녀 얘기야. 해녀들이 전복을 숨겨놓고 ‘내일 좋은 사람이 오면 따다 줘야지’ 해. 전복은 점점 크는데, 이제는 전복에 갈 수 있는 힘이 없어. 늙어서. 마지막에는 보물섬 지도밖에 못 그려주지. 내가 요즘 하는 이야기들이 바로 보물섬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에요.”

그 전복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게 확실한가요?

“중요한 질문이에요. 내가 따 오지 않은 전복이 정말 거기에 있었는지, 그게 정말 전복이 맞는지, 빈 껍질인지 모르는 거야. 따 와야 전복이지. 두고 온 전복은 전복이 아니지. 이게 인생을 속이는 기막힌 일루전(환상)이야.”

실패를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많지. 실패를 해봐야 성공을 하지, 실패도 안 해 보고 어떻게 성공을 하겄어.”

우물을 파다가 우물물이 안 나오면 실패라는 단어를 쓰시나요?

“그렇지. ‘실패했네’ 하고 다른 우물을 파지. 그래서 실패는 좌절이 아니라 도전이에요. 우물을 파서 물 마시려는 사람은 그게 끝이야. 물이 안 나왔으니까. 그런데 호기심으로 우물을 판 사람은 물이 안 나와도 끝이 아니야. 호기심은 그대로니까. 실패를 두려워하고 성공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또 다른 우물물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만족이 없는 법이지. 욕망 자체가 삶이라고 생각하면 노력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선생님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뭔가요.

“생명이지. 나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해요. 생명 자체가 목적이고, 찬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지.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것이야. 죽은 사람이 무슨 고통이 있겄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온 우주에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승리인 생명력이에요. 어떤 절망의 시대에도 생명의 힘은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조선일보 - 김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