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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s)북한의 기독교 순교 역사

작성자
itmedia
작성일
2018-05-03 15:31
조회
84
북한의 기독교 순교역사


 








1.1945년 해방전 북한의 기독교






 












 






북한지역은 기독교가 남한지역보다 먼저 전래 되었다.해방전 북한의 기독교 신자는 조선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약 3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북한지역에서의 기독교 순교자는 1930년대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신사참배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고 볼수 있다.한국교회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게 되어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고 각 교단과 총회는 일본의 정책에 부흥하여 신사참배를 하였다.






 












 






그러나 많은 교회의 교인들이 신사참배 허용에 반대 하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많은 고난과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때 전국적으로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되었고 2,000여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거나 투옥되었고 신앙의 지조를 지킨 주 기철.이기선.재정민.최봉석.최 형림.김의창.방계선.오윤선.안이숙님과 같으신 목사등 50여명이 순교 하였다






 












 






 






2.1945- 1950년 기독교 활동의 단결과 화합 방해의 시기






 












 






해방이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하에 정권을 수립하고자 했을 때 이를 반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북한지역에서의 기독교영향력은 대단히 컸으며 이들에게 협조를 얻지 않으면 북한지역 공산화는 불가능한 하였기에 북한의 기독교정책이 갖는 기본원칙은 기독교의 존립기반 자체를 청산하는데 있으므로 기독교 활동의 단결과 화합 방해의 시기 였다고 할수 있다.






 












 






이 시기는 북한 김일성 공산당이 종교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정책을 적극적으로 못하고 기독교 활동에 화합과 방해를 가하면서 협력을 구하던 때였다 그 이유는 북한지역의 기독교는 막강한 정치세력을 갖고 있어기에 김일성이 북한에서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 하려고 기독교인사들의 잠정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김일성집단이 행하는 종교활동 제한은 교회.성당.사찰 등 종교시설들을 그대로 묵인 하면서 그곳에서 대규모 종교관련 행사및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정도 였다.






 












 






예컨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이웃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금지를 시켰다.






 












 






하지만 김일성집단은 다른 종교보다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제한적 탄압을 시작했다.기독교 단체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려고 전도등 활동에 필요한 경제적 입지여건을 박탈하는 작업에 착수 하였다.






 






 












 






1946년에는 토지개혁으로 기독교 경제기반을 몰수하였고 1948년에는 중요 산업 국유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억압을 본격화 하였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은 외가쪽 강양욱목사를 내세워 어용 기독교 조직인 조선기독교연맹을 194611월 결성하여 김일성정권에 대한 지지운동을 강요허면서 기존의 기독교 조직을 흡수하는 정책을 추진 하였다






 






 






3.1950- 1953년 한국전쟁과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시기






 












 






1949년 말 북한은 한국전쟁을 준비하면서 김일성집단은 종교의식이 발각되면 체포하였고 수시로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하면서 종교관계 서적만 발견하여도 이를 불온문서로 취급하여 체포구금등 탄압을 시작 하였고 이 시기부터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고난을 함께 하여야 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시대를 맞이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6,25은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에게는 견딜수 없는 시련과 고난의 순교시대로 다가왔다.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주의 기독교인 조만식장로을 살해 하면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살해를 했다.






 












 






이 시기에 살해를 당한 기독교인 통계는 없으나 수만명이 될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집단은 그들이 후퇴하면서 기독교 종교인들을 무차별 살해 하라는 명령을 내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였고 죽였다.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양심에 따라 신앙을 지키면서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북한에 있던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남한으로 월남을 했다.






 












 






북한은 북한지역에 있던 종교관련 건물시설들을 파괴해 버리거나 구조를 변경하여 다른목적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남한으로 월남을 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시기에 숙청됨에 따라 북한 기독교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고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을 반 혁명 세력으로 몰아 탄압을 본격히 하였고 그 후 기독교는 지하교회와 지하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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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4- 1960년 북한 기독교 지하교회.지하교인 형성의 시기






 












 






북한은 한국전쟁 패배로 인하여 전쟁이 끝난후 바로 북한에 있는 반 김일성 정치세력을 숙청하는것이 우선이였기에 북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은 시간이 걸였다.






 












 






북한은 19554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계급교양을 강하하라고 지시 하였다.






 












 






계급교양 이란 유신론을 철저히 파괴하고 무신론에 입각한 사상교육을 인민들에게 시키라는 것이다.지장.사회단체.부락별로 회의를 하고 월남자 가족을 중심으로 자아비판을 강요 하였다.인민의 압력으로 기독교나 자유의사를 자백케하는 대중고문이 계급교양 이다.






 












 






이 시기에 김일성 집단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집중적으로 숙청하였기에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나가면서 북한지하교회.지하교인으로 지하로 숨어들게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순교를 한 기독교인 들을 약 5000여명 추산하고 있다.






 












 






북한은 1958년 중앙당 집중지도를 시행하여 북한지하교회와 지하교인들을 포착하기 지작했다.중앙당 집중지도를 시행하면서 지하 기독교단체들이 발견 되었다.






 












 






 






이때 대표적인 예로 이 만화목사 사건이다






 












 






1954년부터 농업의 집단농장이 강제로 운영되자 이 만화목사는 농장원으로 일을 하면서 신임이 얻을 정도로 일을 하였고 농장원 한사람 한사람 접촉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고 양육 하였다.






 












 






이 만화목사는 평북 용천군내 10여개 협동농장에 기독교 비밀조직이 형성되고 2,000명이 넘는 신도가 조직되었다.비밀지하교회는 공산주의자들도 논치채지 못하게 교세가 확장 되어 나갔다.이 만화목사는 농장일 하면서 자연스럽게 성경이야기를 하고 머리숙임 없이 기도를 드렸다.평북 용천지역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호칭을 얻을정도로 일제시대에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지역이다.어떤 부락에는 인민위원 공산당 간부까지 지하교회에 가담 하였다.






 












 






이상 하다고 판단한 북한은 사회안전원 300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명을 용천군에 급습시켜 일제히 검색을 하였다.그 중 두 신도의 가정이 예배를 보고 있었고 그 현장에서 발각되어 처참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이를 보다 못한 이 만화목사가 자진출두하여 지하교회책임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20여명의 신도와 순교를 하였다.






 












 






북한 공산주의 집단들은 이 만화목사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 말살 정책을 본격적으로 감행 하였으며 지하 기독교인들은 더 지하로 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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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에서의 반기독교적 사회풍조는 이 시기에 북한에서 크게 강조된 사상의식의 개조작업의 일환인 반종교 선전으로 이어졌다.1959년 반 종교 선전을 위한 소책자들이 많이 출판 되었다.1959년 노동당 출판사에서 펴낸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 도 출판물 중 대표적인 것이다.이 책에서 우리는 당시 북한사회에 흐르고 있던 기류의 한 단면을 읽을수 있다






 












 






지난 3년간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구한 인민에 대한 학살.약탈.방화 등 비인간적인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적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유의 반 종교적선전 책자들이 출간된 1959년 경에는 사회.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 공식적인 교회 활동이 거의 사라졌던 것 같다.






 












 






1958년부터 1960년초 까지 진행된 주민들 성분조사 때는 종교인과 가족을 반 혁명 계층으로 분류하여 특수지역에서 거주토록 하고 틀별감시대상으로 규명하며 주민들에게 반종교적 선전활동과 기독교 무용성을 주입 시켰다.






 












 






 






5.1960- 1970년 북한지하교인들의 고난 시대






 












 






이 시기에 북한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은 가정교회라고 불리는 기독교공동체의 시기 이기도 하다.1950년 후반이 되면서 북한사회에서 교회에 가고 또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사라진것 같지만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교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극히 부분적이나마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꾸준히 노력할 대신에 이나 하나님의 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신의 생활에서까지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는 인민들이 있다고 북한당국이 인민들에게 경고를 했다.






 












 






이런 신도들을 통해서 1960년대 까지 북한교회의 명백이 가늘게 이어지고 있어지만 공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이미 1960년대 초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것 같다.






 












 






이 시기에 기독교 의식이 발견되면 모조리 체포하고 기독교서적이 발견되면 불론문서로 갖주하여 직접연행 하는등 탄압하였다.그 결과 표면상 북한지역에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과 교회가 없는 문자 그대로 신앙의 불모지대로 만들었다.이 때부터 지하교회 활동이 시작 되었다.북한에서는 엄한 통제의 분의기 속에서도 소규모 기독교인에 대한 저항운동이 있어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에 지하교회.지하교인이 형성되는 시기로 이 기간 동안 3,000명 이상의 북한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하였고 기독교 신앙인들은 사라졌다고 볼수 있는 시기 이다.






 












 






 






6.1970- 1980년 북한 지하교회.지하교인들의 순교의 시대






 












 






이 시기에는 북한 공산당은 기독교를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처형을 하고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을 하였다.이 시기에는 평안남북도에 밀집되어 있던 교회시설들을 몰수하여 회의장.유치원.선전장등으로 용도변경을 했고 교회는 단 1개도 남기지 않았다.






 












 






이 시대를 북한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시대로 평가 할수 있다.






 












 






이 시대에 북한은 잔존 기독교인을 색출하여 사회적으로 격리시켜 관리했다.






 






북한은 소위 주민등록사업에 의해서 51개층으로 분류하여 기독교인 42. 천주교인 44 코드번호를 부여하여 일반감시및 특별감시 대상으로 구분 하였다.






 












 






이 시기는 남아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의 시기 였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기독교의 변화의 시대 였다.변화란 교회조?과 시설.성직자 부재상황에 적응하면서 북한사회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와 신앙생활을 모색.실천하는 과정을 말한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여 하는 비공개적인 가정교회와 개인이 혼자믿거나 가족이 믿는 지하교인으로 나타났을 것이고 친 사회주의적 신앙유형인 기독교 연맹이라는 공적인 제도하에서 소수의 교회지도자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가시화 되었다고 판단 할수 있다.






 












 






이 시기에 순교및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된 사람은 약 2,000여명으로 추산을 하고 있다.






 






 






 












 






북한 공산당은 이 시기에 종교의자유가 있는 것처럼 사이비 관제 어용 종교단체를 만들어 종교를 위장 하였다.사이비 어용 단체인 기독교연맹은 종교말살 정책에 앞장 세워 잔존하는 지하교인들을 색출 하는데 이용하면서 북한이 마치 종교의 자유가 있는것 처럼 국제사회에 선전물로 이용을 하면서 한국종교인들을 반정부 투쟁에로 선동을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7.1980- 1990년 북한 지하교인들의 시대.






 












 






이 시기는 북한기독교 지하교회는 대부분 북한 공산당에 색출이 되어 지하교회는 대부분 없어지고 1953년 이전에 기독교 믿음을 가진 지하교인으로 믿음을 전승 한 시기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 대부분이 60세 이상의 고령화로 자식들에게 조차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을 못하고 일부는 훼손된 몇장의 성경말씀으로 혹은 십자가 목걸이를 차용하면서 기도를 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시기에 순교및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된 사람은 약 200여명으로 추산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북한 공산당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연맹의 기본조직단위로 가정교회가 다른나라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함으로써 가정교회의 구성과 예배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어용 교회인 가정교회는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배는 1930년 중반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사용한 시편 찬송가를 사용 했다.북한 공산당 교회는 1983- 1984년에 성경및 찬송가를 간행했고 교회건물을 1988년 건립함으로 북한공산당 기독교의 내실을 더욱 튼튼히 해 나갔다.이런 종교시설에서는 주일예배및 부활절.성탄절 예배가 집전 되었다.






 












 






이 시기에 북한 공산당이 밝힌 북한 기독교인은 5천여명의 교인들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500개의 예배처소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북한공산당이 선전하는 가짜 기독교인으로 볼수 있다.북한은 기독교가 하나의 대외적인 선저도구로 이용가치가 있을때에는 그 존재를 강조하지만 대내적으로 형법및 조선 노동당 규약등의 규범으로 주민들을 기독교와 격리시키고 기독교에 대체하여 새로운 종교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주입 시키고 있다.






 












 






북한에 봉수교회.철골교회를 건축하고 1989년부터 종교행사를 개최하여 부활절을 지키고 있다.이와같이 북한의 기독교 활동은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이용하고 기독교가 노동당 외곽단체로서 포교활동 보다는 대내외적인 성명서 채택.국제적인 종교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한 정치활동에 치중 하고 있다.






 












 






 






8.1990- 2000년 중국개방으로 북한지역에 선교를 한 시대와 지하교인들 순교자의 시대






 












 






이 시기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지역을 통하여 북한에 지하교인과 북한지역에 선교를 통하여 북한 복음화를 위한 선교비젼의 시대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6,25 한국전쟁시 대부분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한국으로 남하하여 북한은 교회와 기독교 신앙인들이 전무 하였으나 북한 내에는 소수이지만 시자들 특히 기독교 지하교인들이 있었다.이 들의 신앙은 가장 고귀한 신앙이며 교회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한다.






 












 






 






북한지하교인들은 오랜세월 동안 신앙지도를 받지 못하여 개인적이고 기복 신앙적이며 다소 신비주의적 신앙으로 변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 시기에 남.북 기독교 지도자들은 피상적이지만 상호방문하여 통일과 복음화에 대한 논의를 하였지만 실직적인 북한 인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다.






 












 






1990년 초반에 중국 동북삼성을 통하여 한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중국 조선족 전도사들이 북한지역으로 들어가서 기독교복음을 전하면서 북한내 기독교가 새로이 전파 되었다.






 












 






1998년이후 북한 고난의 시대에 많은 북한 사람들이 중국.러시아등지로 십여만명의 북한사람들이 탈북을 하였고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기독교 신앙지도를 하면서 북한교회의 재건의 사역자로 세우시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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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북한지하교인 수는 몇 배 늘어 났고 순교자들도 늘어가기 시작 했다.






 












 






이 시기에 북한지하교인은 급변하기 시작 했다.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매년 기독교인 수가 늘어났고 순교자 수가 늘어 나면서 국제적으로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알려지기 시작 하였다.






 












 






이 시기에 최소한 300여명 이상이 순교와 정치범 수용소로에 갇히게 되었다.






 












 






함경북도.자강도 평양북도 중국 접경지역에 많은 선교 센타가 유입되면서 북한에 지하교회와 지하교인의 조직화가 형성이 된 시기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 북한 기독교 전파는 주로 중국 조선족을 통해서 북한에서 중국으로 임시로 건너온 북한사람들에 의해 가족이나 지인을 통해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북한공산당은 이 시기에 기독교 교인들을 체포하여 간첩죄로 몰아서 공개처형을 하였으며 보위부에서 조사를 한 이후 바로 처형을 하거나 가족이나 접촉자모두를 전치범 수용소에 수용을 하기 시작 했다.






 












 






 






9.2000- 2010년 현제 북한 기독교가 그리스도와 고난을 받는시대.






 












 






북한 지하교인은 북한공산당으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북한내에 복음을 전하는 시대를 맞이 하였다.200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일가족 10여명이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이들은 성경을 보급하다가 순교를 당 한 것이다






 












 






2005년 기독교 라디오을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남포시 주민 102명이 한꺼번에 적발돼 40명은 총살 되었고.62명은 정치범 수용소이 요덕 15관리소로 보내졌다.






 












 






 






북한의 지하교인 수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숫자가 늘어나면서 약 일만명이 존재 한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북한 체제 특성상 지하교회는 불가능하며 가정교회와의 혼동 가능성도 배제 할수 없다는 시각이 있다.왜냐하면 2010년 현제 북한을 탈북한 약 2만명의 탈북자들을 일부에게 조사한 북한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설문에 따르면 1%도 북한 거주시 기독교에 대해서 모른다고 답변을 하였다.탈북한 대부분 사람들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하면서 알게 되었고 북한에서 중국으로 다니는 외화벌이 친척방문자들은 중국내에서 기독교 신앙지도를 받고 북한으로 되돌아가서 일부 친족 혹은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북한지하교인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중국에서 기독교를 신앙지도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 접경지역에서 성경지도를 한뒤 성경책.찬송가.엠피스리(성경.찬송).라디오.






 






기독교 CD.USB를 공급받아서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다.이들이 신앙생활이 발각이 될 경우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을 당하게 된다.






 












 






중국 북한 접경지대은 지금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총칼대신 성경과 식량을 들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북한 전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있다.현제 북한의 주적은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기독교 이다.






 












 






북한내 지하교인들은 성경적 이해가 부족하나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성령님에 대해서 알고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시기에 최소한 500여명 이상이 순교와 정치범 수용소로에 갇히게 되었다.






 












 






VOM 순교자의 소리에서 가지고 있는 북한지하교인들 박해 사례와 북한지하교인들 간증 기록을 보시면 현제 북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고난과 박해를 이해 할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의소리에서는 북한선교를 위해서 사역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선교에 비젼이 계신분들은 연락을 주시기를 바람니다.






 






 






 












 






 












 






참고문헌.VOM 순교자의소리 자료.해방후 북한 교회사.북한 기독교역사.






 






북한교회와 남북기독교 교류.북한교회재건 및 선교전략.조선 총독부 통계연보.






 






북한 지역 해방전 개신교 주요 교파별 교회당 분포,북한의 기독교 조직.






 






월간조선.조선일보.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