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박물관

(cms)내가 본 순교자가 있는 뜰 안

작성자
itmedia
작성일
2013-12-15 23:33
조회
122


 



 




사진1 : 6·25 전쟁 중 19517월 부산에서 거행된 장신대4회 졸업식장의 영락교회직원들 사진(앞줄 왼쪽 첫 번째는 노충섭, 한가운데 한경직 목사와 강신명 목사 최응원 최인실 최의신~뒷줄 왼쪽부터 최신호 백상용~유의성 박순복 뒤로 정석준 김화진)





 




사진2 : 순교자 김응락 장로의 교회장. 본당 제단 잎에서 유족과 함께(1950.11.7.)





 




위 두 사진은 25 전쟁 후 한경직 목사와 강신명 목사가 함께한 사진 중 몇 안 되는, 처음 공개하는 자료이다.




 



 김성보/ 영락교회 은퇴안수집사 ·기독교역사박물관 전 사무국장



 



 



 



내가 본 순교자가 있는 뜰 안





 








필자는 소년시절부터 치면 반세기를 영락교회 뜰 안에 머물러 왔다. 그토록 오래 정들었던 영락교회의 이모저모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부탁을 받곤 한다. 그것은 만남지 편집을 비롯한 영락교회35년사, 교회창립40주년화보, 영락교회여전도회 40년사, 영락교회 50년사 등 사료 제공 등 직간접으로 참여한 연유 때문이다.



 



여기에 기록한 필자의 기억이 모두 맞고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글은 재미 박용범 장로님의 1955년 이후의 증언을 토대로 베다니교회 초기 1947년 이후 6.25전쟁 때 교회 구내 사택에서 살면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정사도 아니고 야사도 아닌 일반적인 역사를 써 보고자 한다.





 




내가 처음 본 영락교회





 




선배 목회자가 된 한중식 목사님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여럿이 영락교회 야사를 함께 써보자고 진심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금 그 분은 건강사정으로 그 일을 못하게 되어 아쉬울 뿐이다.



 



내가 중구 저동 영락교회를 처음 본 것은 19475월 평안북도 구성군 신시교회 유년부생인 일곱 살 때였다. 우리 가족이 월남하여 베들레헴 성전 유년부 예배에 처음 참석하여 박동엽 장로님께서 일제의 말뚝문화를 동화로 말씀하신 것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이곳 천리교 터전은 세조(1455~1468)의 장녀 의숙공주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숙종말기에는 태조의 어진9사진)을 모셨던 성지이다. 일제가 이 유서 깊은 터전 위에 중부경찰서와 천리교 경성분소를 세워졌던 것을 한경직 목사가 천리교를 인수하여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위해 마련한 이 천리교 건물은 돌로 웅장하게 지어져 신궁내부에는 기둥 없이 중아에 타원형의 나지막한 강단이 설치되고, 1,2층에는 유년부와 중등부 학생 500여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 건물을 베들레헴성전이라 불렸다. 교회정문은 나무로 만든 신사 정문이 높게 세워져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정문 오른쪽으로 돌담 울타리가 10여 미터 쯤 처져 있고, 담 한가운데 <베다니교회>목간판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베다니건물의 기억





 




베다니는 정문안 오른쪽 첫 건물이다. 지금의 본당 계단이 있는 둔덕 밑으로 베들레헴을 중심하여 한 줄로 길게 적산가옥이 다섯 채 쯤 있었다. 베다니건물은 사택과 각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1층은 박윤삼 한오권 김신영 최신호 노충섭 한경찬 박선목 이정보 김정길(이상 교역자)와 장병철 장로 등 10여 세대가 신앙공동체로 함께 살았다.



 



1950년대는 베다니건물 주인공이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김종섭 김화진 조석윤 백환규 장윤성 최준묵(2013530일 소천한 최신은 전도사 선친), 그리고 사무실건물 뒷방에는 김규환 이동순 문태식 김도원 등이 살았고, 강제옹 집사는 정문 옆 경비실에서 살았다. 영락교회구내 형편은 연고자의 증가로 주거 환경이 매우 협소할 뿐만 아니라 화장실이나 주방시설도 없이 처절한 생존경쟁을 벌이면서도 새벽이면 모두 일어나 기도하고 찬송하며 가정예배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하늘엔 곤찮고 장생불로



몸신령 하여져 장생불로



괴롭고 무겁게 세상사람 짐 졌네



하늘엔 곤찮고 장생불로





 




베다니 2, 3층은 농아부와 여전도회 휴게실(부인들이 치마를 벗어 유리창에 후당을 치고 쉼), 그리고 각 기관사무실이 함께 사용되어 매우 번잡하였다. 영락교회 농아부와 도서관이 이곳 2층에 처음 문을 열었다.





 




저동269번지! 영락교회 구내는 하나의 구역으로 지금까지 오래된 구역공동체로 목회자 가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경직 목사 기념관이 세워진 목조 2층 사택 담장 안으로 고목 은행나무가 드리워져 있었고, 한 목사님께서 은퇴하실 때까지 사신 김찬빈 사모께서는 줄곧 목사님을 내조하며 몇 십 년 동안 권찰 직분만 하시다가 이곳에서 별세하셨다.



 



50년대 전후로 한 목사님댁 서쪽방향(교육관 앞) 적산가옥은 조의숙 권사의 선친(조상현)과 김린모(장남 김만) 홍용한 방덕규 이영철(보성학교2) 손윤렬(성악가) 공선증(반주자) 김준섭(한 목사님 처남) 등이 살았고, 동사목사 강신명 목사님 사택은 을지로4가 수도극장 뒤에 있었다.





 




천국으로 가는 길목을 뜻하는 엘림관





 




엘림관-, 엘림은 천국으로 가는 길목으로 상징된다. 지금의 엘림관은 베다니교회 초기부터 홍용한 장로와 전 문공부장관을 지낸 전성천 목사댁, 이익엽(재현학원설립자)에 이어 배우 전택익 노경희 부부가 살던 적산가옥 2채를 본당을 세우며 교회가 매입하여 두었다. 6·25전쟁 고난의 길을 가신 김응락 장로님께서 체포되어 걸으신 중부경찰서 골목에서 일어난 비화이다.



 



김응락 장로님(1906~1950, 평북의주)1950923일 인민군이 본 교회를 철수한 줄로 알고 그가 정성 드려 지은 교회를 둘러보고 갈 생각으로 교회에 들어섰다가 인민군 잔당 체포되어 사택계단(중부서쪽 골목)에서 일어난 순교자의 발자취를 김응락 장로와 전성천 목사의 모친의 기지로 살아난 영락청년 김만 선생(김린모 장로의 장남)의 숨 막히는 증언을 요약 소개한다.





 




김 만 선생의 증언





 




《 ---1950923일 서울탈환작전의 포성은 멀리 울리고 최후 시가전을 결의하는 인민군 군화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나는 여동생 넷을 이끌고 신촌에서 삼청동 언덕의 김영복 권사댁으로 피신처를 옮겼다,



 



-중략-



 



 나는 여동생에게 영락교회를 돌아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김 권사님 댁을 나와 종로와 을지로를 건너 영락교회 후문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이제 수 천 명의 성도들이 땀과 눈물로 세워진 교회건물을 찾을 수 있게 되는구나하고 샌각하니 감격의 눈물과 콧등이 시큰해 진다.



교회 정면 계단 밑에 까지 왔을 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칼빈총과 엽총을 멘 인민군 두 명과 부녀자 몇 명이 나를 둘러싼다. 부녀자 한 명이 이 자도 교회 열성분자이다라고 인민군에게 일러바친다.



 



내가 교회 열성분자임을 안 인민군은 나로 하여금 교회를 향하여 계단을 걸어 올라가라고 한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다. 걸어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인민군은 나에게 엽총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위기일발이다. 나는 손을 들고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인민군은 나를 여기서 총살 하는 것은 타인의 눈도 있고 해서인지 나의 양손에 수갑을 채우고 중부경찰서 직할파출소로 연행한다. 파출소에 들어가자 긴 나무의자에 힘없이 푹 고개를 숙인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알겠는가?’한다. ! 이 사람이 김응락 장로일 줄이야--교회를 돌아보려 왔다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모진 고문을 당하신 모양이다.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의 태연한 자세 그대로이다.



 



인민군은 나를 끌고 가더니 우리가 철수할 줄 알고 교회건물을 접수하러 왔지.’ ‘적군비행기에 신호를 몇 번 보냈느냐?’하며 장작개비로 내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 치며 혹독한 고문을 가한다. 죽음을 각오한 나에게 아픔이 있으랴---.



 



이렇게 한 시간쯤 하더니 나와 김 장로님을 교회 옆 계단으로 교회건물을 향하여 올라가게 한다. 물론 우리를 교회 구내에서 총살 하려는 것이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우리는 찬송을 부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 죽음을 앞둔 엄숙한 시간이 흐른다. 이 때 계단 집 2층 창문으로 전성천 목사의 모친 되시는 할머니(김노미 권사)가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신다.



 



할머니에게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지키다가 찬송을 부르며 죽어 갔다---’,



 



 ‘남은 식구와 온 영락교인들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을 전하고 나와 인민군은 먼저 걸어서 교회정면까지 올라 왔다. 할머니와 이야기 하시던 김 장로님의 얼굴이 계단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자 인민군은 나를 남겨 놓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반대로 인민군의 얼굴이 계단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찬스이다. 수갑을 찬 그대로 나는 교회 뒤로 도망쳐 교회 구내에 있었던 나의 집 유리 창문을 재빨리 열고 마루마루밑에 깊숙이 기어들어 갔다.



 



다행히 나를 본 사람이 없다. 잠시 후 인민군이 뛰어 가는 군화소리가 들린다. 나를 찾는 모양이다. ‘주여, 살리시든지 죽이시든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잠시 후 두세 발의 총성이 들린다. 기분 나쁜 예감이다. 혹시 김 장로님이 당하시지나 않았나---



 



-[영락교회 제1남선교회 회보 1997년 가을 호 8-13]





 




9·28 서울수복 후의 영락교회





 




9·28. 수도서울이 수복되자. 안양으로 피난했던 우리 가정은 영락교회 베다니건 물로 되 돌아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교회 정문을 들어서니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서로 부둥켜안기도 하며 안부를 묻는다.



 



베다니건물에 함께 살던 조의숙 권사댁과 한경부 집사(베들레헴성가대. 재미)가정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남아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한경부로부터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들었다. 김 장로님의 순교현장 이야기로부터 그 후에 일어난 인민군의 만행을 여기저기 보여 주었다.



 



김응락 장로님의 임시 묻힌 곳을 찾아 지금의 동별관 입구 정문안 공터에 흙을 얇게 덮어 놓은 시체를 보았다. 김 장로님의 장례는 그 때까지 장로님들이 귀경이 늦어짐에 따라 치루지 못하였고, 923일 순교한지 45일 후인 117일 교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 터틀리안의 글귀가 생생한 영락의 뜰 안이다.



 



엘림관이 자리한 이곳은 교역자들이 사시던 애환이 서려있는 천국으로 가는 길목이다. 여기가 곧 영락교회 안수집사들이 모여 기도하며, 친교와 봉사로 주일 준비실로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