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성경(聖經)과 성(性)은 함께 할 수 없는 단어일까?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20-04-06 14:50
조회
129

성경(聖經)과 성(性)은 함께 할 수 없는 단어일까?


성경에서 본 성


성경(聖經)과 성(性)은 함께 할 수 없는 단어일까?


거룩한 성경에서 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소위말하는 불경죄에 해당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성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렇게 주저하는 것일까?


사실 그동안에 우리의 사고(思考)를 지배해온 ‘성’에 대한 기본 인식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우리나라의 경우 초기 기독교의 ‘성’에 대한 사상에다가 유교적인 관습까지 덧붙여져 ‘성’은 항상 은밀하고


어두운 곳에서만 방치되고 마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러한 ‘성’에 대한 의식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사람이 ‘성 어거스틴’이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에 있었던 성적인 탈선이 회심후에도 ‘성’에 대한 인식을 그토록 부정적으로 만들지 않았나


판단이 된다. 그래서 그는 “출산의 목적이 아닌 성관계는 죄“라고까지 주장하였다.


불행히도 이 가르침은 중세의 금욕시기를 지나면서 기독교계의 중요한 생각으로 자리잡게 된다.


‘롬바드와 그라티엔(Peter Lombard & Gratien) 같은 이도 “출산을 위해 성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관계가 있으면


성령은 떠날 것”이라고 까지 말한바 있다. 그리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이브스(Yves of Chartres)‘ 같은 이는 “목요일은 그리스도가 잡히신 날이기 때문에, 금요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므로, 토요일은


동정녀 마리아의 영광을 인하여,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며, 월요일은 박해받고 숨져간 모든 영혼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성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성’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행 10:15)는 말씀은 ‘성’에서만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는 성을 뭐라고 정의하며,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에 대한 디자인을 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일이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아이디어에 의해 창조된 ‘성’


하나님은 인간의 어느 부분 하나 헛되이 만드신 것은 없다.


그것은 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계획 자체가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으로, 곧 성적으로 결합하여 생명 창조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됨’과 함께 즐거움과 쾌락을 누리도록, 또 사랑을 나누는 도구가 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참으로 신비한 것이 인간의 성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히려 성은 거룩한 것이고 경건 그 자체이며 삶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디자인 의도라는 것이다 문제는 오용되고 남용됨으로 말미암아 성이 타락된 개념으로 받아 들이고


있을 뿐이다. 타락 이전의 성 개념은 한마디로 ‘내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섬기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 그것이 性生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은 남편과 아내가 하나됨을 체험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 말하는 것이다.


‘성’은 친밀한 부부의 교제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부부가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 행위는 육체, 정신, 全人格的으로 둘이 하나가 되는 극치의 표현인 것이다.


사실 “性交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이 따를 수 없는 용어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적합하게 표현할 용어가 필요한데 성교는 바로 그 문장이 되어 주는 것이다.(Elton Trueblood)“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성경에서도 “둘이 한몸이 될지니라”가 네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2:24, 마19:5, 막10:8, 엡5:31) .


성경에서 ‘성’을 금지하는 것은 단지 부도덕성을 방지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을 뿐 이다(잠 5:15-23, 고전 7:1-5).


그래서 성은 남편의 전 인격과 아내의 전 인격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성에는 육체적 결합보다 더 많은 의미,


예를 들면 사랑의 느낌, 관계, 동행, 존경 같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 성경에 나타난 ‘성’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경에서는 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먼저 구약성경에 나차난 주요한 성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 보자.


창세기 1장 28절의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우선 종족의 번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창세기 2장 18-2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자라는 이성을 창조하신 중요한 동기가 남자가 홀로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한다. 이는 인간의 창조때부터 서로 함께 사는 존재로, 서로에게 기쁨과 감격,


그리고 소망을 주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며 서로를 찾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본능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담은 세상의 만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면서 그 외로움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하와를 데려다 주셨을 때 그 첫 번째의 사랑 고백이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사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새번역)라고 고백하였겠는가?


더불어 창세기 2장의 말씀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너무나도 끈끈한 연합이 기본이라는 점을 말씀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가계를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기록한 창세기 19장 역시 성과 하나님의 의도를 적고 있다.


곧 성의 남용과 오용이 가져 온 집단적 성적 문란과 타락으로 뒤덮인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특별히 5절의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중에서 ‘상관하리라’는 것은 그들과 성적 관계를 가지겠다는 뜻이다.


그만큼 공공연하게 성적 문란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성애까지 난무한 세상이니 그 어찌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오지 않을 수 없으랴! 그러자 롯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두 딸을 대신 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다.


롯조차도 그러한 세상적인 풍조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크리스천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면 세상이 크리스천을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창세기 26장 6-11절의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 이야기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신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이삭은 어느 날 밤, 아내를 애무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아비멜렉 왕이 이를 목격하게 된다.


그때 이삭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이삭의 애무 행위는 누가 보더라도


아내와의 관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농도짙은 성행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그러한 성적인 애무 행동이 사람들에게 보편화되어 있었고,


허용받을 수 있는 일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결국 부부이니까 그러한 관계가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창세기 39장에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성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허용하신 성적 관계는 부부간에 한해서였다.


그런데 잘못된 혼외 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 사회의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보디발의 아내마저


요셉을 유혹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유혹에 대해 담대하게 맞서게 되는데,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는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남겨준다.


곧 성적인 타락이나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5절도 성적인 충동이나 욕구가 강할 때는 그러한 기쁨과 충동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곧 부부간의 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음을 알게 된다.


물론 젊은 군인이 자손을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도 있지만 충분한 기간을 주셨다는 것은


부부간의 즐거움을 위해 성을 주셨다는 사실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잠언 30장 19절도 성은 신비스러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아가서는 그 자체가 연인과 부부간의 성을 묘사한


것이지만 특별히 1장 2절 같은 경우는 성은 즐거운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2장 3절은 만족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2장 16절은 성은 소속감을 가져다 주며, 8장 10절은 성은 평안을 준다고 표현할 정도로 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성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태복음 5장 27=30절을 보면 특별히 성적으로 투명해야 함을 강조한다.


곧 타락된 사회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유혹에 빠져들도록 계속 충동질을 한다. 결국 우리가 결단하지


아니하면 그 세상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은 성적인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강조하면서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겸비해야 함을 강조한다.
로마서 1장 24절과 12장 1-2절을 보면 그 당시의 시회를 휩쓸고 있던 성적 타락 현상을 적시하면서 성도들은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할지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이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성적 문란과 타락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성적 타락과 부패는 인간들의 욕망에 의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성적인 문란을 막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도 음행에 대한 바울의 경고를 적고 있다.


바울은 성적인 욕구는 부부간의 관계에서만 허락되는 것임을 말하면서 음행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전 6:18, 갈 5:19-21, 골 3:5, 살전 3:5, 4:3-4). 그러면서 성 행위에 대한 원칙을 제시한다.


이 구절(2-5절)을 허버트 마일스는 이렇게 새롭게 정리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강한 성욕이 있어 남자는 아내가 있어야 하고 여자는 남편이 있어야 한다.


남편은 정기적으로 아내의 성욕을 채워 주어야 하고 아내도 남편의 성욕을 정기적으로 채워 주어야 한다.


결혼하면 아내의 몸은 남편에게 속하고 남편이 아내의 몸을 다스리듯이 남편의 몸은 아내에게 속하고 아내가 남편의


몸을 다스린다. 서로 상대방의 성욕을 채워 주기를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단, 기도하기 위해 당분간 금욕하기로 합의를 본 경우는 제외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부는 성욕을 다스릴 수 없으므로 이 기간이 지나면 다시 성교를 해서 서로 성욕을 채워 주어야 한다.”


히브리서 13장 4절은 성은 거룩하고 귀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즉,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성경의 여러 부분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2절, 19장 4-6절, 누가복음 16장 18절, 요한복음 3장 29절,


로마서 1장 26-27절, 고린도전서 7장 9절, 에베소서 5장 3-12절, 23-24절, 디모데전서 3장 2절,


디모데후서 2장 22절, 유다서 1장 7절 등도 성에 관한 하나님의 관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3) 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함께 하도록 주신 여자”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머리로 주신 남자”이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사랑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남녀의 성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짓이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성’을 선물로 주신 목적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생명의 창조를 통한 종족 생산(출산)의 목적(창1:27-28, 9:1, 시127:3)이 있다.
‘성’을 통해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위임하셨다.


하나님은 ‘복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신 동시에 축복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양육될 자녀를 낳는 것(시 127:3)이 성을 주신 하나님의 첫 번 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은 반드시 결혼을 배제한 성적 결합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혼전, 혼외 성교는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2) 예방의 목적이 있다.(고전 7:1-2)
성경에서 성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항상 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


3) 부부의 하나됨을 위한 목적이 있다.(창 2:24, 마 19:5, 막 10:8, 엡 5:31)
① ‘영혼의 친밀성’을 위함이다.
성은 영혼의 친밀성을 표현하기 위해 계획되어졌다.


하나님은 단순히 열정과 힘에 의한 사랑을 표현하기위해 성을 계획하시지 않았다.


성의 수학(數學)은 “1+1=1”이다. 신뢰와 사랑, 서로에 대한 안정감 등이 있을 때만 가능한 영․혼․육의 합일인 것이다.
② ‘육체적 연합’을 위함이다.
성은 육체적 연합을 위해 계획되어 졌다. 성은 깊은 수준의 육체적 결합을 창조하기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성관계에 있어 ‘삽입’이 수반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내의 몸이 자기의 몸처럼 느껴지는 것은 육체관계 외에는 없다.(김인자)“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③ ‘관계의 연합’을 위함이다.
성은 관계의 연합을 위해 계획되어 졌다.


그래서 성경은 성교가 부부를 친숙하고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중의 하나다.


그래서 상대방 앞에서 알몸이 되는 것은 육체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정서적, 영적 합일의 상징인 것이다.
④ ‘영적 연합’을 위함이다.
성은 영적 연합을 위해서 계획되었다.


하나님께서 성을 일차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로써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⑤ ‘하나됨을 위한 배타성’을 위함이다.
성은 결혼을 위해 배타적으로 보존되도록 계획하셨다.


성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고린도전서 7장 4-5절 말씀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배우자에게 자유롭게 줌으로써 이 은사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성이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부부애 속에서 일생동안 헌신하면서 함께 살고 있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영적,


육체적인 축제인 것이다. 그래서 성생활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에드 휘트’는 “배우자 서로가 아무런 육체적인


친밀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부 두사람이 가졌던 모든 감정적이고 영적인 친밀감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출산의 의미만을 강조하고 이 하나됨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이 ‘한몸’이라는 개념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와 영적으로 하나됨을 나타내는 지상적 형상임을


이해한다면 신비스러운 하나됨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부부가 육체적으로 친밀함을 경험 할 때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됨을 이 지상적인 개념을 통해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은 성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을 창조하신 중요한 의도는 바로 이것, 단순한 육체의 하나됨을 초월한 육과 혼과 영을 결합시켜


주는 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4) 삶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위함이다.(신 24:5)
성은 즐거움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성욕도 하나님이 주신 욕구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제도 안에서 사용할 때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창 18:9-12).


성적 포옹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말씀도 잠언 5장 15-20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가서에서도 성적 즐거움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아 5:10-16, 7:1-9).


하나님께서 주신 성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성행위란 매우 깊고 가깝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알게 되는 영교(靈交)와 동고동락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육체관계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비결을 배우는 것이다.


5) 치료를 위한 목적도 있다.(삼하 12:24, 창 24:67)
성을 통한 치료의 역할, 이 또한 하나님의 의도이셨다.


‘사무엘하’에서 다윗의 아들이 죽었을 때 아내와 동침하는 장면이라든지, ‘창세기’에서 이삭이 모친 상사 뒤에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위로를 얻은 장면들을 살펴보면 배우자가 좋지 않을 일로 절망하고 있을 때, 스트레스나


슬픔이 있을 때, 육체적인 위로가 사랑을 나누어서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함을 알 수가 있다.
‘즐거운 성’은 인격을 완성시키고 위로하며 하나가 되는 치료제로서 작용을 한다.


클라인벨 부부는 그들의 책 ‘The intimate Marriage’에서 ‘성은 감정적인 연합을 표현하는 즐겁고도 아름다운


방법일뿐 아니라 관계를 강화시키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교는 사랑을 키워주고 사랑에 의해서 자라난다’고 말한다.


또 ‘결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육체적, 정서적, 영적 연합은 벽을 넘어선 두 내면 세계를 연합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적인 영들의 연합은 외로움과 내면의 고독을 없애주는 강력한 치료제’라는 것이다.
‘잭 도미니안(Jack Dominian)’도 그의 책 ‘Marital Breakdown'에서 “자존감이 낮고 자신감이 부족할 때 성행위는


안도감이상의 역할을 한다’면서 그것은 아마도 ‘배우자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치료의 처방책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성의 치료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4) 성에 대한 하나님의 10가지 기본 원리


‘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설계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외에도 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는 여러 가지 원리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성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는 하나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용될 때만이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히 13:4).


TV나 소설에서 멋있게 묘사하는 혼외정사에 대해 유혹되지 말라.


2) 성경에서 성행위를 금지하는 목적은 항상 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전 6:13).


따라서 절대 결혼 안에서 맛볼 수 있는 만족과 즐거움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바로 쓰고 즐겨 쓰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육체관계는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창 1:31, 아 7:1-9).


3)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는 배우자에게 있다. 따라서 성은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철저하게 배우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생활은 결혼 생활에서 가장 희생적인 부분이어야 하고, 배우자를 즐겁게


해 주고자 하는 동기가 있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7장 3-4절 말씀을 통한 사도 바울의 권고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 아내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것인양 손도 못 대게 한다’라는 불평이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은 결코 스스로는 채울 수가 없는 상호 의존적인 것이다.


‘그대가 원하신다면 언제든지’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또 배우자가 아니면 어떠한 사람도 채워 줄 수가 없는 것이기에 서로를 섬기는 도구로서 사용되어져야 한다.


배우자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나의 의무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배우자의 외도(外道)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4) 부부간의 육체 관계에 제한은 없다.


‘두 사람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제3자를 끌어들이지 않는 한 부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한 현인의 가르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서로가 사랑을 표현하는 어떤 방법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한없이 즐거움을 누릴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금하는 성적 행위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린다 딜로우).


* 음행 ; 계모와 동침하는 것(고전 5:1), 창녀와의 성교(고전 6:13),
혼외정사(고전 7:2, 살전 4:3), 간음(마 5:32)
* 간음 ; 결혼하지 않은 사람과 동침하는 것(마 5:28).
* 동성연애 ; 레 18:22, 20:13, 롬 1:27, 고전 6:9
* 불순과 방탕 ; 처녀성을 잃어버리거나, 세속적 또는 이방인의 생활 양식에 따라 살게 됨으로써 더럽혀지는 것을


  의미함(고후 7:1, 계 22:11).
* 혼음 ; 다른 부부들과의 혼음은 더 이상 고려의 여지가 없다.
* 매춘 행위 ; 성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
* 음담패설 ; 부부 사이에 주고 받는 성에 대한 유머가 아닌 여타의 속된 말들 (엡 4:29, 5:4)
* 근친상간 ; 레 18:7-18, 20:11-21
* 남색(男色) ; 오랄 섹스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성경은 동성연애, 성전에서의 매춘 행위를 가르킨다.


5) 창조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한다. 배우자에게 신선하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성적인 만족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편들은 생활하는 데는 현모양처를 원하나 침실에서는 요부를 원한다’는 옛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능숙하고 창의력 있는 파트너가 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합당한 것이다’


(요셉 딜로우, ‘성에 대한 솔로몬의 지혜’에서).


6) 성관계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성이 목적 그 자체일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면 ‘성 숭배’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성’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정의 평화를 이루게 하는데 더 큰 이유를 두어야 한다.


따라서 ‘성’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벗어날 때 하나님과의 화평도 깨어지고 배우자와의 화평도 금이 가게 된다.


7)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한 목적 이외에는 분방해서는 안된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분방도 버릇이 된다.


자꾸 분방하다 보면 배우자가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싫어지게 된다. 옆에 누가 있으면 잠 못 자는 버릇이 그래서 생긴다. 이유와 핑계는 없다. 절대 분방하지 말라.


8) 배우자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배우자의 성 욕구를 거절하지 말라.


성관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과 관계를 갖지 않을 것’ 이라고 하는 성적인 흥정이 있어서는


안된다. 솔로몬이 밤늦게 술람미 여인을 찾아 왔을 때 그의 요구를 거절했던 여인의 후회,


그리고 솔로몬을 다시 찾아 나서는 여인을 우리는 아가서에서 볼 수 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사랑. 아무 조건 없이 배우자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성생활에 필요한 자세이다.


따라서 배우자의 성적 욕구를 거절하는 것은 가장 밀도 깊은 좌절을 안겨 주는 셈이 되고, 이는 성생활의 문제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의사 소통의 좌절은 정신적인 의사 소통의 장애까지 유발하게 된다.
‘성’을 오용하지 말라. ‘성’을 배우자에게 대적하는 무기로 사용해서도 안되고 속이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도 안된다.


변덕스럽게 남편을 거부해서도 안되며 보복하기 위해 육체적 사랑을 억제하는 것은 죄이다.
“성행위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 부부들에게 언제나 강력한 안도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서로가 원하고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기와 엄마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초기의 때묻지 않은 관계를 제외한다면 삶의 다른 데서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무조건적 수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잭 도미니안, ‘Marital Breakdown'이라는 책 중에서).


9) 성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필요와 반응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남자는 육체적인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며 시각적 반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는 감정적인 것에 근거해서 행동을 하며, 시각보다는 촉각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벧전 1:17)고 해서 남편에게까지 하나님 수준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편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편의 성적인 즐거움의 동기 유발을 위해 아내가 적극적인 행동, 즉 내적인 충만 뿐만이 아닌 외적인


아름다움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전서의 ‘외모로만 하지 말고’(벧전 3:3)의 말씀에 괜한 위안 받지 않는게 좋다. 이 말씀은 외모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다.


가장 아름다운 화장을 보여 줄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남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0) 영적인 충만이 강해질수록 성의 신비스러움을 느끼는 정도도 깊어진다.


영적인 사람일수록 성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영적인 성장을 하면 할수록 육체 관계에 대한 신비를 느끼고 더 즐긴다는 통계도 있다.


우리가 영적인 깨달음, 또는 중생(重生)했을 때 대지의 자연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낀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성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깨달음 이후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새롭게


눈에 띄게 될 것이다.


(5) 성, 너무나도 중요한 성


히브리어로 야다로서 ‘안다’(창 4:1, [d'y: knew)는 것은 ‘남녀간의 동침 즉 성교(性交)’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언급할 때도 쓰여졌다. 또한 ‘성기’에 대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볼 때 성적 연합은 하나님과 그이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라고 불렀고(사 49:18, 렘 16:9), 간음이라는 단어는 다른 신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묘사하는데 쓰여지곤 했다(렘 7:9, 23:10, 겔 23:37, 사 57:3). 이러한 성적 상징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곧 성경에서 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제 성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만 한다. 성이라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남용하고 오용을 한다면 그야말로 인간에게 주는 저주가 될 수 밖에 없다.


성은 천국에는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된 부부로 살아갈 때 그 부부는 진정한 성의 기쁨과 희락을, 감격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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