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성결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1-26 17:21
조회
52

성결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


우리집 옆에  교회가  하나 들어섰는데  성결교회라 간판이  걸려있네요
성결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요  인터넷을 보니  이상한  소문도  돌고
그와  반대되는  의견들도  있는데  궁금하네요  아는분들은  설명좀  부탁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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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결교회 신학 변천사 -박명수(서울신대 교수)  

성결교회 신학의 정체성(正體性)과 과제

한국성결교회는 지금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총회적인 차원에서도, 신학대학의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신학대학원 원우회가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토론의 광장이 열려서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본인에게 주어진 제목은 성결교회 신학의 정체성과 과제이다. 이 제목은 두개의 주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첫째로 성결교회신학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요, 두번째는 현대사회와 관련하여 성결교회의 과제에 대한 설명이다. 첫번째 주제는 역사적인 질문이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역사적으로 검토되어져야 한다. 두번째 질문은 한국성결교회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며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보다 현실적인 질문이다. 본인은 이 두 주제를 나누어서 생각할려고 한다.

I.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

1) 문제의 발단

한국성결교회는 1907년 정빈, 김상준 두사람이 동양선교회의 도움으로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한국성결교회는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로, 해방후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한국의 주요교단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1960년대까지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성결교회의 시작부터 성결교회의 모습을 지켜본 성결교회의 역사의 주역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명직목사로 대표되는 이들은 성결교회는 체험적인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교단으로서 이해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엽에 미국에서는 웨슬레의 재발견이 한창이었고, 60년대말에는 이런 영향이 한국성결교회에 미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이 18세기의 웨슬레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웨슬레에게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성결교회는 원래부터 웨슬레의 초시대감리교회를 이어받자는 정신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를 직접 연구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를 말할때 그것은 웨슬레의 전통을 이어받은 19세기의 복음주의적 감리교의 신앙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한다면 한국성결교회는 19세기말에 미국에서 형성된 복음주의적 성결운동을 웨슬레와 동일시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단내에서는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웨슬레 자신에게 둘것인가 아니면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거기에 둘 것인가로 고민하게 되었다. 이것이 새로운 웨슬레안과 한국성결교회의 원로들 사이에 생겼던 갈등이라고 생각된다.

한편에서는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웨슬레에게 두려고 하는데 대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이 외국의 어떤 신학적 사상이나 계통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성결교회 자체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7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맞물리고 있다. 즉 한국교회사를 선교사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성결교회가 자생적인 교단이라는 주장과 함께 많은 한국성결교회의 신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국성결교회가 역사적으로 맺고 있는 동양선교회와의 관계와 또한 성결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사중복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의 촛점은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느냐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성결교회는 18세기의 웨슬레에게 그 뿌리가 있는가? 아니면 순수한 한국 사람들의 독창적인 작품인가? 이 둘이 다 일방적인 주장이라면 도데체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여기에서 본인이 다루고자하는 문제의 첫번째 부분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우리는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질문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질문이라는 것이다. 즉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지나온 과거가 무엇이며, 그리고 그 과거에 의해서 형성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따라서 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항상 구체적인 자료에 의해서 입증되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논의가 필요이상의 복잡한 논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한국성결교회와 18세기의 웨슬레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명직목사는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레의 초시대감리교회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계승하기 위하여 생겨난 단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성결교회의 배경이 되는 동양선교회가 웨슬레안이라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양선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단체인 애즈베리신학교, 웨슬레안교회등도 말할 것 없이 웨슬레안이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성결교회는 어느 점에서 웨슬레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 그것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이다. 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교회가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 하에 일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성결교회의 핵심은 성결이다. 그리고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의 뿌리는 웨슬레에게 있다. 근대개신교의 역사에서 웨슬레의 위치는 성결의 전파에 있다. 웨슬레는 감리교회의 사명이 성결의 전파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미국감리교회는 이 성결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하였고, 감리교회에서 나와서 따로 성결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이 단체들이 곧 나사렛교회, 필그림성결교회, 구세군등이다.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핵심은 성결에 있다. 카우만의 증언에 의하면 경성성서학원이 세워질 때 다른 교파에서 연합하여 세우자고 제안하여 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성결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로 독자적으로 경성성서학원을 세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초기 한국성결교회는 성별회라는 집회를 가졌다. 이것은 오직 성결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긴 집회이다. 이 당시에는 교세보고도 중생자 00명, 성결자 00명이라고 보고하여야 했다.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크게 보아서 웨슬레의 성결론과 같다. 물론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이 웨슬레의 성결론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성결교회 헌법은 성결, 이는 신자가 받을 <성령세례>를 가르킴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결코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하지는 않았다.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한 것은 19세기의 웨슬레안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체적으로 웨슬레의 성결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죄는 원죄와 자범죄로 나누어지고, 자범죄는 칭의로서, 원죄는 성화로서 해결된다. 그리고 성화는 중생과 성결의 두단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말하는 성결은 무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복음적인 의미에서 성결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웨슬레안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온전히 거룩해 질 수 있다는 은총의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다.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은 칼빈주의와 비교하여 보면 분명하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철저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여 버렸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나머지 절대예정론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런 극단적인 주장으로 나가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선행적 은총)을 통한 의지의 자유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자유의지와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웨슬레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회가 칼빈주의 계통이라면 우리 성결교회는 웨슬레안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성결교회는 모든 점에서 웨슬레를 계승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본인의 대답은 아니오 이다. 무엇보다도 사중복음이 그대로 웨슬레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물론 중생과 성결은 웨슬레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신유와 재림은 19세기 미국복음주의의 산물이다. 웨슬레가 신유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민간요법을 통해서 가난한 빈민들을 치료하려고 했다. 또한 웨슬레의 재림론은 세대주의적은 전천년설은 아니다.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은 19세기 중엽의 달비(John N. Darby)에게서 기원한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은 18세기 웨슬레의 중생과 성결의 복음과 19세기의 신유와 재림의 복음이 결합되어 형성되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론에 있어서도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레와 구별된다. 웨슬레는 영국성공회의 성직자이다. 그는 영국성공회의 고교회적인 전통을 받아들여 유아세례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성결교회는 성공회의 고교회(High Church)적인 성례전과는 다른 성례전이해를 갖고 있다. 즉 성례전자체에 신비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보다 더욱 부흥회적인 전통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흥회적 전통은 성례전을 매체로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만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웨슬레가 성례전과 부흥회적인 요소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면 한국성결교회는 부흥회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레안의 전통에 서있다. 특별히 칼빈주의와 비교하여 볼 때 그렇다. 장로교회가 칼빈주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웨슬레안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한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한국성결교회가 웨슬레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신유와 재림, 그리고 성례전에 있어서 그렇다.

3) 한국성결교회의 한국적인 요소

한국성결교회는 1907년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세월을 지나면서 한국성결교회에 한국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가미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한국성결교회는 한국의 성결교회이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한가지 오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초기한국교회와 미국선교사의 관계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민족주의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미제국주의(?)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이후의 상황이다. 일제시대에는 달랐다. 물론 외교적으로 볼때 미국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승인해 주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미국선교사들에게 기대었다. 특별히 구한말에는 이것이 분명했다. 즉 한국인들에게는 밀려오는 일본의 세력보다는 미국에 의지하고 싶었다. 이것이 1907년 한국성결교회의 상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당시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한국인은 미국인과 공동전선을 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즉 정빈, 김상준은 일본에 가서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했지만 그들은 한국에 성서학원을 만들기를 원했다. 이것은 분명히 나까다 주지를 중심으로한 일본인들의 입장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동경성서학원을 아시아 선교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정빈, 김상준은 일본인의 손에서 벗어나 서울에 성서학원을 만들려고 하였고, 여기에 카우만이 동조해서 결국 한국에 경성성서학원이 설립된 것이다. 그리고 정빈, 김상준은 친일적인 단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서양선교사가 와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상주 선교사를 요청하였고, 이래서 온 사람이 토마스(John Thomas)이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사이에 밀월관계가 계속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교리적인 문제때문이 아니고 교회의 정치제도에 관한 문제였다. 한국성결교회는 초기부터 감독제도였다. 그리고 감독은 당연히 선교사였다. 물론 1920년대 중엽부터는 이사회제도가 있었지만 이것은 일인지배체제에서 집단지배체제로의 변화일 뿐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가 대의제도를 통한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순종해야하는 감독제도 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선교사를 중심으로하는 감독제 지지파와 그것을 반대하는 반선교사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잠시동안 감독제도를 반대하고 대의제도인 의회체도를 도입하여 보았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해방이후 한국성결교회가 재흥총회를 시작할 때 한국성결교회는 성결교회의 정체성이 대의제도임을 분명히하여 감독제도를 분명히 제거하여 버렸다. 사실 해방이후에야 한국성결교회의 명칭에서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이 빠지고, 기독교대한 성결교회가 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볼때 한국성결교회의 정치제도는 한국성결교회가 선택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한국성결교회의 교리적인 유산인 웨슬레안의 전통과 사중복음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근환총장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신학적인 전통은 동양선교회와 미국의 성결운동을 통한 웨슬레안 알미니안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 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성결교회가 반대한 것은 동양선교회의 일방적인 지배와 동양선교회를 배경으로한 한국성결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반대였다.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로부터 한국성결교회의 독자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제는 완전한 자립, 자치교단으로 성숙했다. 따라서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레안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교회의 운영에 있어서는 동양선교회에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주적인 자세를 가진 독립교단인 것이다.

4) 한국성결교회와 근대복음주의의 특색

본인은 한국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하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웨슬레에 대한 연구도 더욱 활발해야 하고,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에 대한 연구도 보다 깊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서 근대복음주의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레안전통을 포함한 근대복음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은 그들의 신학적 기반을 근대복음주의에 두고있다. 뿐만이 아니라 한국성결교회는 근대복음주의와 역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19세기 말에 형성된 미국의 복음주의적인 성결운동이 직접적인 동양선교회의 뿌리가 되어왔고, 그 이후에도 계속 한국성결교회는 이 근대복음주의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면 성결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근대복음주의의 특색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복음주의의 특색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강조이다.

한국성결교회의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이다. 물론 웨슬레신학도 중요하고, 정통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성서를 능가할 수는 없다.

19세기 말에 성결운동이 신유와 재림을 중생과 성결과 더불어서 강조할 때 정통 웨슬레안들은 신유와 재림이 성결운동의 본류에서 벗어나는 곁길(side track)이라고 하여 부정하였다. 그러나 만국사도적성결연맹(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을 중심으로한 급진적 성결운동은 신유와 재림이 성서의 핵심사상이라고 하여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사도적이란 사도행전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결교회의 궁극적인 모델은 신약교회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한 정통칼빈주의자들이 신유가 초대교회에만 국한되며 그이후의 시대에는 사라졌다고 주장할 때 이들은 성서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다는 단순한 성서적 신앙으로 맞섰다. 따라서 성결교회의 신학의 근본은 성서이다.

둘째 체험적인 신앙이다. 19세기 근대복음주의의 공격의 대상은 자유주의뿐만이 아니라 정통주의였다. 물론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정통보수주의와 동일시 될 수도 없다. 정통보수주의는 정통교리의 수호가 제일 중요한 관심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신앙이란 정통신조에 동의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졌다. 근대미국복음주의의 역사는 정통보수주의와의 투쟁의 연속이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은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파(new side)와 그것을 반대하는 구파(old side)사이에서, 제 2차 대각성운동은 부흥회를 지지하는 신파(new school)와 반대하는 구파(old school)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이었다. 근대복음주의는 신앙을 단순히 지적인 동의로 간주하는 정통주의에 반대하여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믿는 경험주의적인 신앙의 승리였다. 한국성결교회는 정통교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정통교리 못지 않게 성서적 신앙을 구체적인 삶가운데서 체험하는 것을 강조한다.

세째 복음주의적인 연합이다. 근대 복음주의는 부흥회적인 상황에서 출발했다. 부흥회는 종종 교파의 범위를 넘어서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갖곤 하였다. 왜냐하면 부흥사는 항상 교파를 넘어서서 모든 교파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흥사는 교파의 차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모든 교파를 묶는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썼고, 그 공통점을 통하여 교파를 넘어서서 활동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런 부흥회에서는 중생이 공통점이 되었다.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는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교파의 확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 복음주의적인 연합운동의 특색이 있는 것이다. 초기한국성결교회는 복음전도관이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이들의 목적이 특정한 교파의 설립이 아니라 진정한 신자를 만들어서 모든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네째 온전한 복음의 선포이다. 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교회가 동양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의 순복음을 전하고자 세워졌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순복음은 영어로는 Full Gospel이며, 이것의 정확한 번역은 온전한 복음이다. 성결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워진 교단이다. 그러면 온전한 복음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복음을 전체적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의 복음은 개신교의 구원의 복음을 분명하게 밝혀주었지만 인간의 속사람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여기에 대해서 죄에서의 용서뿐만이 아니라 온전한 새사람의 복음을 전한 것이 성결의 복음이다. 이것은 칭의의 복음에 비해서 온전한 복음이다. 그러나 중생과 성결은 다같이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신약에는 영혼에 대한 관심 못지 않게 육체의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신유의 복음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는 이렇게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이 함께 어우러질 때 성서의 온전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된다고 믿는 것이다.

한국성결교회는 한국기독교에서 대교단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가 갖고 있는 이와같은 신학은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주류는 결코 정통보수적인 신앙도 새로운 신신학도 아닌 온건한 복음주의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것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고 생각된다. 한국교회의 일반신자들은 교리싸움만을 일삼는 보수주의도, 이해하기 힘든 신신학도 거부하고 성서적인 신앙을 소박하게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바로 이런 소박한 복음주의의 신학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신학이 성결교회이며, 그 신학교가 서울신학대학교라고 생각한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