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가톨릭과 종교개혁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1-22 05:03
조회
74
 

 * 가톨릭과 종교개혁


‘면죄부 판매’ 로마가톨릭 도덕적 타락…


루터, 개혁 열망 담아 1517년 반박문 발표







[한국교회,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2부] (2) 가톨릭과 종교개혁 기사의 사진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 교리 자체를 개혁한 신앙의 재발견이었다. 독일 베를린 돔교회 입구에 설치된 동판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국민일보DB


[한국교회, 위기를 넘어 희망으로-2부] (2) 가톨릭과 종교개혁 기사의 사진





역사가들은 유럽의 중세 1000년을 암흑기로 표현한다. 성직자들은 도덕적 타락의 길을 걸었고 권력을 이용해 부패를 일삼았다. 특히 10세기부터는 ‘로마가톨릭주의’의 폐해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이 시기를 “교황과 대립교황들 사이의 끊임없는 음모와 전쟁, 살인과 폭력의 시대였다”고 평했다. 당시엔 성직 매매와 세습이 만연해 로마가톨릭 내부에서도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클루니 수도사들은 형식주의와 미신을 배격했고,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성직 매매와 세습을 막기 위해 11세기 후반 성직자 독신제도를 도입했다.

14세기부터 16세기 중엽까지는 가톨릭교의 부패가 극심했다. 십자군전쟁이 막을 내리고 1309년 로마의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진 뒤 교황권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두 명의 교황이 생겼고 서로 정통성을 따지다 세 명의 교황을 세우는 ‘대분열 시대’까지 겪었다.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개혁의 불빛은 명멸했다. ‘전(前) 종교개혁자(Pre-Refomer)’로 불리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클루니 수도사들이나 교황에 의한 개혁과 달리 로마가톨릭 교리의 정정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프랑스의 피에르 왈도는 십자군운동 당시 로마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했다. 그를 따르는 ‘왈도파’는 자체 신앙고백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연옥설을 부인했고 7성례 중 세례와 성찬만 인정했다. 로마가톨릭은 이들을 즉시 이단으로 내몰았다.

로마가톨릭의 7성례는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발표한 것으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혼배 신품 종유’를 뜻한다. 로마가톨릭은 성례전을 구원론의 일부로 본다.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의 저자 신광은 목사는 “죄는 영혼의 질병이고, 은총은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고, 성례전은 은총을 담은 주사기와 같다”며 가톨릭의 구원론을 설명했다. 성례전은 사제를 통해서만 효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평신도는 철저히 사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교회 교황 권력의 근간은 여기에 있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례전에 많이 참여해 은총의 양을 축적해야 했다. 여기서 공덕을 쌓는 만큼 죄를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공덕(공로)의 신학’이 나왔다. 그런데 공덕이 쌓이면 교황이나 교회가 그 공덕을 꺼내 쓸 수 있다고 해석해 이른바 ‘면죄부’를 만들어냈다. 교인들은 헌금을 내고 회개의 완성을 입증하는 증서인 ‘면죄부’를 구매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는 1215년 라테란공의회가 선언했던 화체설(성찬식 때 먹는 빵과 포도주가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학설)이 성육신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롤라드’로 불린 추종자들은 성경 전체의 영어번역을 완성했다. 교황청은 죽은 지 40년 지난 위클리프의 유골을 파헤쳐 화형에 처했다.

얀 후스는 프라하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자국어로 설교하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가르쳤다. 그는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 건물이나 사제들이 교회의 대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로마가톨릭은 이단이라며 화형에 처했는데,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시편을 낭송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은 145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혁신적 인쇄술로 성경을 대량 인쇄하면서 중요한 동력을 확보했다.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는 “사람들이 성서를 쉽게 접하면서 로마가톨릭의 주장이 성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수용했다”며 “개혁의 중심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 있었다”고 말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못 박았다. 그는 참된 회개는 성례전이나 면죄부 같은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듬해에는 자신의 견해를 40개 항목으로 요약한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고 로마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을 정면 비판했다. 이후 3차례 논쟁을 거쳐 이단으로 정죄 받고 보름스칙령에 의해 갇혀 지내면서 독일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루터란'으로 불렸던 루터 지지자들은 독일과 북유럽, 미국 등 전 세계로 퍼졌다. 루터파 교회는 10여 년에 걸친 투쟁 끝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정식 종교로 인정받아 프로테스탄트교회를 탄생시켰다. 루터의 개혁은 이후 스위스의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 운동,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영국의 종교개혁 등으로 이어지며 전 유럽으로 확대됐다. 이들은 130여년간 전쟁을 치르며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개신교는 이후 경건주의와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했고 경건주의는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를 변화시켰다. 웨슬리는 18세기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피난하는 독일의 복음주의자 공동체 '모라비안'과 함께 선교를 떠났다. 인간 중심이었던 계몽주의의 열풍 속에서도 복음의 진리를 고수했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의 후예인 조너선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다.

총신대 서창원(역사신학) 교수는 "한국교회는 로마가톨릭을 반면교사로 삼아 교회의 외형과 규모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만으로 교회다움을 나타내는 개혁교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2014. 7. 11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