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성경속의 포도주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3-25 19:10
조회
58
성경속의 포도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술에 대한 의견은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기독교인도 술을 마시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 확실하게 잘라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체로 신교 측은 술에 대해서 엄격하고, 구교 측은 약간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듯하지만, 개인의 신앙심과 취향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술 특히 포도주에 대해서 이중적인 태도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쓴 전도서의 한 구절을 보면 “너는 가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도서9: 7) 즉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즐겁게 포도주를 마실 것을 권유하고 있는 문구이다. 그렇지만 잠언에서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잠언 23: 31) 같은 포도주를 놓고 한 사람의 의견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성경의 애매함 때문인지, 아니면 앞 뒤 구절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단편적인 문구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인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성경에서 최초로 포도주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은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정착하여 농사를 시작할 무렵이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세기 9: 20,21) 노아는 그의 식구들과 함께 홍수가 끝난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몇 가지 지시사항을 받고 농업을 시작하였는데, 다른 농업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물론 그 다음 취한 후에 일어날 사건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구절로 미루어 다음과 같은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즉 노아 이전의 고대 인류도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마셨으며, 이들 생활에서 포도주는 필수적이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보편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과, 노아의 방주에는 포도나무 아니면 포도 씨 정도는 보관되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포도의 원산지를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산이 있는 소아시아로 보는 학계의 견해도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포도는 중요한 생활의 양식

포도나무는 기름진 땅에 심는 작물은 아니다. 조금은 척박하고 건조한 석회질 토양에서 겨울이 춥지 않으면 잘 자란다. 옛 사람들도 중동지방에 정착한 뒤 오늘날 같이 포도나무를 기르고 묶어 주고 흙으로 덮어서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흙을 걷어내고 가지를 쳐주면서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주를 담았을 것이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아가 7: 12) 또 성경에서는 여자들이 포도를 재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밭을 간품하며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잠언 31:10-16) 이런 구절로 미루어 포도주는 옛날부터 이들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군의 여호아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이사야 25: 6) 이 시대에도 포도주는 축제, 손님접대, 종교행사 등과 관련이 있었고 그 질도 꽤나 따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예수가 태어나기 칠백 년 전에도 질 좋은 포도주란 오래 저장한 맑은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주 틀을 밟는 자와 같으뇨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와 포도나무는 비유에 많이 인용되는 것으로 등장하지만 그 비유를 통해서 어떻게 포도주를 담았는지, 포도주를 담아본 사람이라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주 틀을 밟는 자와 같으뇨”(이사야 63: 2) 이 구절은 예수의 고통을 예견한 이사야의 예언이지만, 포도즙을 짤 때 포도주 틀(압착기)에 포도를 넣고 발로 밟아서 작업을 했으며, 일하는 도중에 붉은 포도즙이 옷에 묻어 엉망이 되어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에 근본적인 차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현대적인 방법은 기계를 사용하고 그 제조원리를 알고 한다는 것뿐이다.

붉은 포도주는 포도를 수확하여 바로 으깨어 발효시키고, 발효가 진행되면 압착기로 그 즙을 짜서 온도가 일정한 곳에 보관하면서 찌꺼기를 가라앉히고 숙성시킨다.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가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과 같아서 그 맛이 남아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 하였도다”(예레미아 48: 11) 물론 이 구절도 비유에 사용된 것이지만, 포도주를 담고 나서 찌꺼기를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된다는 점을 충고하고 있다. 요즈음 같이 여과 기술이 발달해도 찌꺼기를 다루는데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하는데, 옛날에 찌꺼기가 없는 맑은 술을 만들려면 상당한 끈기와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주를 이 그릇 저 그릇 옮기면 찌꺼기가 가라앉지 않고 맛과 냄새가 변한다고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또 사용하는 용기에 관한 충고도 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약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22) 이 비유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잘 알고 자주 사용하지만, 왜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넣으면 터지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기술이 발달하여 여러 가지 포도주를 담는 용기가 많지만, 예수가 살았던 시절에는 포도를 항아리 같은 큰 그릇에 넣고 발효를 시켰고, 완성된 술은 가죽부대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마시거나 운반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런데 옛날에는 당분이나 알코올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혀나 코의 감각을 이용했기 때문에, 새 포도주에는 알코올 발효가 덜 된 상태로 당분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새 포도주를 온도가 낮은 곳에서 보관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온도가 높으면 다시 발효가 일어나 탄산가스가 나오게 된다. 부드러운 새 가죽부대에서는 어느 정도 가스가 차더라도 부대가 팽창하여 여유가 있지만, 오래되어 딱딱한 가죽부대는 쉽게 터지게 된다. 특히 한낮의 온도가 높은 중동지방에서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포도주가 다시 발효를 시작하여 헌 가죽부대를 터뜨리는 일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런 구절은 포도주에 관한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포도주가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서양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성경에서는 포도주 때문에 일어나는 윤리적인 사건도 다루고 있다. 당시 포도나무는 신선한 과실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포도나무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가꾸어 왔고 재산으로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다. 열왕기에는 유명한 포도밭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나붓이란 사람이 좋은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포도밭을 탐내는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도밭도 뺏긴다(열왕기 상 21: 1-16)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밭 소유권에 관한 기록이다.

또 포도주에 물을 섞는 사례도 많은 것 같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이사야 1: 22) 우리나라도 막걸리에 물을 섞는 일이 자주 있었고, 물을 섞은 술은 손님이 취한 다음에 내 놓아야 발각되지 않는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요한복음 2: 10) 이 일은 예수가 세상에 나와서 처음 행한 기적으로, 결혼식 피로연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연회장이 예수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마셔보고 신랑한테 하는 말이다.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낮은 것'이란 물을 섞은 포도주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잘 나타내고 있다.

 

포도나무의 비유

포도는 적절한 관리를 해야 잘 자라며 또 이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많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포도나무와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비유로 많이 사용되었다. 좋은 예가 시편 80편에 나오는데,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는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이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하셨나이까.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편 80: 8-13) 여기서 포도나무란 모세가 이집트에서 끌고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며, 큰 포도나무란 왕국을 이야기하며 곧 요르단 강에서 바다까지 차지한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 이스라엘을 벌하는데 하나님은 먼저 담을 허물어 버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포도밭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사람과 짐승의 침입을 막고, 수확기에는 높은 망대를 세워 밤새 감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도 프랑스 포도원 중에서 '클로(Clos)'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담으로 둘러싸인 포도밭'이란 뜻이다. 담이 허물어지면 사람이나 들짐승이 마음대로 침입하여 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 즉 나라의 멸망에 대한 애처로운 음률은 가엾은 포도나무가 밟히고 파괴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예수의 생애는 포도주로 시작하여 포도주로 끝을 맺었다

신약에서 포도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떡)과 포도주로 축복하고 자신의 희생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넌지시 암시하지만 제자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러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 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2-24)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빵(떡)과 포도주 두 가지 삶의 요소를 설명함으로서 포도주는 그 생애의 극적인 정점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또 예수가 세상에 나온 후 맨 처음에 행한 기적도 포도주를 이용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 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한복음 2: 7-11) 예수의 활동이 포도주로 시작하여 포도주로 끝을 맺었다고 이야기하면 신성모독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도주를 즐겨 마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포도주는 이들의 의식과 문화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었고, 이를 이어받은 기독교에서도 포도주는 주님의 피로서 행사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포도주스는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성경 속의 포도주를 강조하는 것이 음주를 정당화시킨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번역이 잘못되어 포도주스를 포도주라고 한 게 아닌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에는 포도주스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포도는 그 껍질에 발효를 일으키는 이스트가 묻어있기 때문에 포도를 으깨어 주스를 짜내면 하루 이틀 만에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 술이 되어 버린다.

오히려 포도주스는 그 수명이 하루나 이틀 유지되는 정도로, 옛날 사람들이 포도주스를 보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포도주스는 적절한 살균방법이나 첨가제 그리고 밀폐된 용기를 개발한 근대 과학의 혜택을 받고 난 다음에 생긴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과일주스를 보편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백년도 채 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추운 겨울에 보관했던 사과나 짜서 그 주스를 차가운 곳에 보관해가며 마셨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성경을 읽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경 속의 포도주를 과학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도리 수밖에 없다.

 

올바른 음주

포도주가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만큼 그에 대한 올바른 음주법, 포도주에 대한 비판, 그리고 과음에 대한 꾸짖음 또한 준엄하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 18), “아침 일찍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이사야 5: 11), 그리고 통치자의 음주에 대한 경고도 있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치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할까 두려우니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그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통을 기억지 아니하리라”(잠언 31: 4-7) 현대 우리 사회의 공직자나 사업하는 사람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구절이다. 술 먹이며 부탁하는 자리가 많다는 것은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을 목에 힘주면서 안 해주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을 사정하는 자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포도주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고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사도 바울은 초기 기독교의 엄격한 전도자였지만, 이천 년 전에 이 사실을 간파하고 그의 젊은 친구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디모데전서 5: 23) 포도에는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이 있어서 알코올과 상승작용으로 순환기, 소화기 계통의 질병을 치유 또는 예방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무엇보다도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시편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편 104: 15) 이러한 구절은 포도주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의학적인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울러 “조금씩 쓰라”는 전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에 따라 해석은 다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흑백논리로 명쾌하게 답변을 내리지는 않는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상징적인 의미를 깊이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이라면 단편적인 구절을 인용하여 교인이라도 술을 마셔도 괜찮다는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심이 있든 없든 성경에서는 취하지 말고, 항상 적당한 음주를 충고하고 있으며, 또 정직하게 포도주를 만들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마실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포도주는 하나님 혹은 자연이 인간에게 베푼 귀한 선물이다. 술로 인한 해독으로 그 명성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력의 열매를 즐거움으로 만끽하면서 사도 바울의 충고대로 “조금씩 쓰라”는 구절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