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작성자
강용진
작성일
2020-01-14 17:10
조회
75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 12~14)

교회의 역사 안에서 사도 바울 다음으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이었다. 어거스틴은 타락과 방황과 불신앙적인 삶을 살다가 인류사에서 위대한 성인(聖人)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인기와 존경심이 최고에 달했을 때 「고백록」을 출판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다. 마치 신앙이 깊어질 수록 죄인식과 겸손함이 커져서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가장 작은 사도"(고전 15:8-9), "보든 “모든 성도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 마지막에는 “죄인의 괴수”(딤전1:15)라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과 흡사하다.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s)을 복수(複數)로 표현했다. 죄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처럼 죄 고백은 감사와 찬양을 동반한다.

어거스틴은 중세의 신학과 개신교회 신학의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는 고대에 나타난 모든 신학사상을 종합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를 했고, 후대로 넘겨주어 중세와 근대 신학의 모태가 되도록 했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White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어거스틴은 타락과 방황으로 불신앙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인류사에 위대한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고백하였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가능하면 자신의 잘못은 숨기고 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자신에 대한 인기와 존경심이 최고에 달했을 때 「고백록」을 써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였다. 바울도 신앙의 성숙성이 깊어질수록 고백이 바뀌었다.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15:8-9),

  1.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은 354년에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에서 기독교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모니카는 남편의 방탕을 인내로 참아내며 남편과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 직전(37년)에 세례를 받았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재능을 일찍 발견했고 세속적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어거스틴은 11세에 웅변가가 되기 위해 라틴어를 배웠고, 17세에 대도시 카르타고에 가서 수사학 학교에서 공부한 우수한 학생이었다.

어거스틴이 태어난 Tagaste=Souk Ahras, Carthago=Tunis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신앙을 잃고 방탕의 도시 카르타고에서 죄의 달콤함에 깊이 빠졌다. 그는 한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 18세에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아들을 낳았다. 어거스틴은 또한 연극에 탐닉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카르타고의 드라마는 그의 감정을 깨끗하게 하는 대신에 상처를 할퀴는 것 같이 짜증스럽게 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19세에 철학을 발견하면서 극장의 쾌락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키케로(Cicero)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다가 ‘지혜를 향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에 그는 진리탐구를 위한 방황을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회심을 하고 신앙으로 돌아오기까지 누구보다도 더 깊은 윤리적, 지적 방황을 하였다.

"오 하나님, 내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20대에 마니교에 빠졌다. 마니는 216년 바벨론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르침은 중국, 인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퍼져나갔고, 기독교 신앙에 큰 위협이 되었다. 마니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은 두 개의 물질인 ‘선과 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의 원리가 강하게 지배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사상이 나온 것은 세상에는 절대선이 없고 선과 악이 영원히 대립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욥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인정을 받는 사람도 어느 날 재산이 다 날라 가고, 가족들이 비명횡사하고,  자기 몸까지 병들어 비참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반면, 악하고 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그 자식들도 잘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운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한다. 마니교 사상은 신정론에 응답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당시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빠진 것을 알고 눈물로 기도했다. 교회의 주교는 모니카에게 “오직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는 독서를 통해 스스로 잘못이 무엇인지 발견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어거스틴은 공부를 통해 마니교의 모순을 발견했다. 그는 어느 날 마니교의 최고 이론가, 파우스투스를 만났는데 자기의 고민거리를 명료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니교에 흥미를 잃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빠져나와 로마로 와서 선생으로 성공하려고 했다.

이제 마니교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 첫째, 하나님도 영원하고 악도 영원하다면 하나님은 절대주권자가 될 수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악에게 승리하시고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지, 악과 영원히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 둘째, 악은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원래 선한 것이었고, 물질은 생명에 유익한 것이다. 물질을 악하게 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 셋째, 마니교적 윤리관은 죄를 지은 후 '악의 원리'에 책임을 전가하게 만든다.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고도 내 안의 사탄이 죄를 짓게 했다고 하는 것은 현대적 마니교적 사상이다.



  • 넷째, 마니교는 죽기 전까지 금식하고 완전한 신자로 환생을 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를 가르쳤다. 육체적 훈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는 2~6세기 유럽에서 성행했던 철학사상으로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가 정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에 의하면, 만국은 궁극적이고 알 수 없는 일자(一者, the One)에서 유출되어 지성의 영역(완전한 직관적 지식)과 그 아래 감각세계(산만한 사상과 행동)를 구성한다. 그러나 만물은 관상(contemplation)을 통해 다시 일자로 되돌아 가려는 상향운동을 하게 된다. 만물은 상하 두 방향의 운동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을 진리를 찾기 위해서 감각세계를 벗어나 신비적인 황홀(ecstasy)를 통해 일자와 직접적인 합일을 추구해야 하며, 탈아(脫我)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물질을 악하게 보았고, 일자와 가까우면 선하고 멀어지면 악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악이란 물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선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384년 어느 날, 모니카는 로마에 있는 어거스틴을 찾아와서 그를 밀라노의 유명한 설교자 암브로시우스(Sanctus Ambrosius, 340?-397 주교에게 데려갔다. 암브로시우스는 390년 데살로니가 주민을 학살한 데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395)에게 부활절에서 성탄절까지 성사를 집행하지 않고 교회 밖으로 좇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데오도시우스는 381년 제3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했고, 391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결정한 황제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어거스틴의 두 가지 의심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 근거하에서 옹호될 수 있고, 구약의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보지말고 은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제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암브로시우스
386년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다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롬10: 17). 어거스틴은 어느 날 "하나님, 왜 지금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가 없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그때 "들고 읽어라."(tolle lege) 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듣고 어거스틴이 성경을 폈을 때 로마서 13: 13-14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회심

어거스틴은 387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성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기도하는 어머니와 암브로시우스라는 좋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전기는 방탕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고, 또한 인생에서 좋은 신앙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것을 함께 알려줏낟.

어거스틴은 회심을 하고 모니카와 함께 로마를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에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였고, 곧 모니카는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원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17세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성직자로 안수를 받고 히포의 주교(395)가 되어 목회를 하면서 신학적 작업에 전념했다.

어거스틴 사상은 변화 발전했다. 마니교와 투쟁할 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적극 옹호했으나 펠라기우스와 투쟁하면서 자유의지를 악하게 보았다. 초기에는 신인협동론적이었으나 후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게 된다.

(2) 사상

  1. 어거스틴의 신학사상


1) 창조론

①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from nothing)

물질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법에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세상은 신의 신체의 일부로 만들어졌다는 신화론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신은 보이지 않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의 창조론에서 중요한 것은 “무(無)로부터의 창조”(ex nihilo)라는 사상이다. 다음의 예화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자.

2500년 미래의 어느 날, 과학자들은 드디어 인간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우리는 흙으로 인간을 만드는 능력을 배웠습니다. 이제 지구는 우리들 손에 맡기고 하나님은 쉬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대답하였다. “그러면 나하고 사람을 만드는 시합을 해볼까?” 과학자들은 좋다고 응답했다. 그래서 과학자 대표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인간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흙을 떠가지고 실험실에 들어섰다. 이때 하나님이 소리쳤다. “그러면 안 되지 내 흙 가지고 하지 말고 네 흙 가지고 해야지”

인간은 유(有)에서 유(有)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無 )을 있게 하신다. 인간은 발명하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가르침이다. 내가 지닌 육체, 정신, 생명, 영혼은 없던 것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다. 내 안에 믿음도 본래 나에게 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었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다.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나를 만드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고 교만이다.

② 시간과 영원(time and eternity)

 어거스틴의 창조론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해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을 연장하면 영원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잘못된 욕심이 들어 있다. 시간을 아무리 연장해도 하나님 나라(영원)가 되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피조된 것으로 이해한다. 시간은 피조된 것이어서 언젠가 끝이 나지만, 영원은 피조 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어거스틴의 시간과 영원에 대한 사상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크게 발전시켰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역사에 대해서는 비관도 하지 않고 낙관도 아지 않는다. 다만 신앙 안에서는 낙관론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③ 진보적 역사관

어거스틴의 역사 사상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고대종교와 철학은 역사가 회전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것이 윤회설이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통해서  역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과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계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직선으로 펴놓았다.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직 있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다. 어거스틴으로 인해 역사에 진보 개념이 출발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역사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리고 역사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이 땅 위의 것이 아니고, 교회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2) 교회론

①  교회의 거룩성

어거스틴 당시 도나투스파는 기존 교회가 거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분열시켰다. 교회의 거룩성 문제로 분열이 일어난 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과연 교회의 거룩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303-305년 기독교 박해 시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성경을 없애면 기독교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교회는 여러 가지로 의견이 갈라졌다. 일부는 교회의 보전을 위해 성경을 주자고 앴고, 다른 일부는 것을 배교(背敎)라고 했다. 또 다른 일부는 박해자의 무지를 이용해서 이단 서적들을 넘겨주고 위기를 넘겼다.

세월이 흘러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도나투스(Donatus, ?-355)는 40년 동안 아프리카 북부의 카르타고의 주교이자 해외선교 책임자였다. 그는 박해 시기에 성경을 넘겨주었거나 이단 문서를 주고 타협한 주교들의 직분은 무효이며, 그들이 베푼 모든 성례도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거룩한 교회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분리시키고, 재세례를 주었으며, 기존 교회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폭력으로 막았다.

어거스틴과 도나투스 논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의(one) 거룩하고(holy)  보편적이고(catholic or universal), 사도적인(apostolic)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한 교회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회분열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죄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나투스파 문제에 대처하면서 교회론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도나투스파가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강제성보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도나투스파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자 어거스틴은 질서 유지를 위해서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했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 주교에게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실시하지 않았고, 분리되기 전에 성직 서품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서품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관용을 보였다.

황제의 군대는 도나투스파들을 학살했고, 후에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슬람에게 넘어갔다. 도나투스 교회는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언어를 쓰는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교회였다. 어거스틴은 보편 교회를 강조하다가 지역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약점이 있었다. 교회는 보편적이지만 자기 문화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서 보편성이 표현되어야 한다.

도나투스파를 죽이는 표범-모자이크

어거스틴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했다. 보이는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어서 외관상으로 누가 구원받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교회는 ‘택함 받은 사람들의 전체’이므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나투스파의 문제는 교회의 거룩성이 눈에 보이는 것이고, 성도들의 윤리에 달려있다고 오해했다. 기독교인들은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교회의 거룩성은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교회라고 해도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교회를 무시하고 분열해서는 안된다.

② 성례의 효과

도나투스파는 잘못을 범한 성직자가 베푸는 세례와 성만찬, 안수를 무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직자의 성례는 사람의 인격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과 권위를 의지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베푸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정당하게 임명된 성직자의 성례는 “수여행위 그 자체에 의해”(ex opere operato) 은총이 수여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집행하고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성례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다.

③ 교회의 사도성

교회 안에는 사도성이 전해져 내려온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주교직이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교에게만 사도적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그 사도적 계승권을 인정했으나, 교회 밖에서 받은 세례도 믿음으로 받았다면 교회 내부에서 받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참된 사도직은 직제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진정한 사도직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도 사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많고, 교회 밖에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선지식이 있으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은 교회의 세례와 성례에 묶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3) 펠라기우스주의와 은총론

어거스틴 신학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절대무능,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 영혼의 의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거스틴 이전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총과 어느 정도의 인간 자유의지의 협력으로 이해되었다. 어거스틴 이후 서방 신학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어거스틴의 구원론과 은총론이 정리되는 계기는 펠라기우스주의와의 투쟁이었다.  펠라기우스(Pelagius, 350경-423이후)는 웨일즈 출신의 수도사로서 로마가 함락되기 직전인 405년경에 로마에 와서 부패한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금욕주의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그 반대파들이 요약해 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안 짓고 상관없이 죽었다

② 아담의 죄는 자신에게만 해당되고 인류에게 손해를 주지 않았다.

③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④ 그리스도 이전에도 죄 없이 살다 죽은 사람이 있다.

⑤ 갓 태어난 아이는 죄가 없다.

⑥ 인류는 아담의 타락으로 타락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⑦ 사람은 자기가 원하면 죄 없이 살 수 있다.

⑧ 세례를 받아도 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 공로가 없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펠라기우스 사상을 요약하면 인간은 원죄가 없고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윤리적인 노력으로 자력구원(自力救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우리의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훗날 그는 죄짓지 않는 능력은 가능성이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418년 정죄되었다.

어거스틴은 정욕과 출세의 욕망에 사로 잡혀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사랑'과 '정욕'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돌이킬 수 없다고 보았다. 악은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본성이 타락이다. 그는 타락 이전에 사람은 '죄 짓지 않을 능력'(posse, non peccare)이 있었지만, 타락 후에는 '죄 짓지 않을 능력이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상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에게 죄지을 자유는 있지만 죄짓지 않을 자유는 없다는 ‘노예 의지’(servo arbitrio)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사도바울과 일치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로마서 7.19-24)

어거스틴은 원죄가 유전된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의 의지를 움직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공박했고, 인간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것을 저항할 수 없다고 보았고 강한 예정론을 주장했다.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예정론은 훗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에게 영향을 주었다.

4)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어거스틴이 죽은 이후에도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을 지속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다수는 인간에게 원죄가 있지만 자유의지는 남아있어서 구원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529년 오렌지 교회회의(synod)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킨다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예정론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가 협력한다고 보기 때문에 신인협동론(synergism)이라고 부른다.

5) 역사와 종말

410년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약탈했다. 이 사건은 로마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나님을 믿는 로마 시가 왜 무너지는가?’ 이교도들은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버리고 기독교 신을 섬겨서 그렇게 되었다고 비난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비난에 대답하기 위해 15년에 걸쳐「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했다.

로마의 멸망
이 책은 기독교의 역사철학을 설명하는 고전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도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도성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사랑의 도성이고 인간의 도성은 교만의 도성이다. 인간의 도성은 자기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경멸로 건설되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부정으로 건설된다. 인간의 도성은 인간에게 칭찬받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도성은 양심의 증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복음전파를 위해 로마에 평화를 주셨지만 그 역사적 사명이 완수되면 로마는 스스로 지은 죄와 우상숭배 때문에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도성은 로마제국의 붕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도성은 영원히 지속되고 결국에는 완성되는 나라이다. 지상의 교회가 비록 많은 악과 섞여 있지만 본질과 의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성이다. 어거스틴의 관점대로 로마는 망했으나 교회는 새로운 문화 속으로 들어가 세계화되었다.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제국은 늘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하지만 인간 문명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완성된다.

인간의 도성은 영원한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히 지속되고 결국 완성되는 나라이다.



  • 어거스틴은 기독교인들에게 땅의 시민권과 하늘의 시민권이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 하늘의 시민권은 절대로 한 국가나 문명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이다.

  • 로마는 자기들을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와 민족이라고 생각했고, 한때는 영국과 미국이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제국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어거스틴의 두 왕국설은 혁명이나 점진적 교육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걸설 될 수 있다고 믿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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