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12제자에 관한 성격 및 특징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8-12-20 19:08
조회
98

예수님의 12제자에 관한 성격 및 특징


의심많은 제자/디두모 도마(요 20:24-29)


1)이름과 배경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이름이 디두모와 도마로 두 가지 이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도마는 아람어이며, 디두모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이 두 가지의 뜻이 똑같이 “쌍동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하나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이 왜 쌍동이였는지는 알길이 없으며, 역사적으로 고증하기도 어렵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그가 쌍동이로 태어났을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그의 분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쌍동이들에게는 심리학적으로 서로 시기하고 다툴 수 있는 가능성이 일반적인 아이보다 많다. 쌍동이 형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같은 것들이 아마도 도마로 하여금, 의심을 많이하게 하는 성격으로, 그의 성장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인물과 성격


 

4복음서에 열두 제자의 이름이 거론될 때를 제외하고 도마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과 도마가 각별한 관계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 요한이야말로 도마란 인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며, 도마가 주로 요한의 눈에 띄였기 때문에 도마의 행적이 요한복음에만 집중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도마를 둘러싼 사건을 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보여 준다. 첫째는 요한복음 11:16을 전후해서이며, 두번째는 요 14:5을 전후해서이고, 세째는 요 20:24이하에 도마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다.


 

$.요 11:1-16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장이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던 사실을 아셨다. 요 11:3을 보면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나사로의 병들었던 사실이 기록되었음을 본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는 말씀에서 예수께서 곧장 달려가신 것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이 두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구체적으로 주님은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7절 이하의 말씀에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는 말씀에서 예수는 유대 지방에서 곤경을 당하고 이제는 나사로가 누워있는 장소로 직행할 줄로 알았는데 그 유대 땅으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신다. 시간이 흐른 후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말씀하심인 줄 생갈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1:13-15)” 이 말씀을 통해서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이제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16절에 도마가 등장한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우리는 이 말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의 위험을 이해하고 나선 것이라면 굉장히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예수님이 살아했던 나사로, 제자들도 잘 알고 친했던 나사로의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계속 지체했던 스승에 대해 빈정대는 말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학자들은 후자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도 도마는 항상 어둡고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 14:1-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어떤 배경으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를 가리켜 “예수님의 마지막 다락방 강화”라고 말한다. 지상에서의 최후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예수님은 떠날 것을 말씀하시고 근심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처소를 예비할 것이며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하신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11장에서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했을 때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에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을 때 도마는 전과 같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지금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을 때 도마는 예루살렘 바깥에 대주택이라도 마련해 놓으신 줄로 알고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가는 길이 어디인줄 알고 우리가 따라 갑니까?”반문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마에 대해서 하나의 희망을 걸 수있다. 그것은 예수님이어떤 말씀을 하시면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고 즉시 말 대답을 한다. 그는 그렇게 반문하면서 무엇인가를 계속 찾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석연치 않지만 자기의 신앙에 대한 문제나, 모든 삶에 대한 자기의 그 대답이 아직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는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붙들고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신학자는 도마의 인물됨을 묘사하면서 “그는 회의에 찬 사람이지만 절망적 회의론자는 아니다. 그는 차라리 구도적 회의론자에 가깝다. 그는 진리를 찾고 있는 회의론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주님을 놓칠 수 없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질문을 묻고 있는 신앙적 회의론자다”라고 하였다. 비록 그의 말 속에는 불평이 섞여 있고, 자조적인 언사가 그 말의 바탕에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어도 질문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을 우리는 높이 살 필요가 있다.


 

$.요 20:24-29


 

평상시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그 손을 넣고 그 못자국을 만져 보았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전에는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고 버티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친절하게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넣어 보고 만져 보아라” 그 순간 그는 엎드러지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한다. 한편은 싸늘한 이성적 회의주의자같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뜨겁고도 진지한 열성을 가지고 진리에 대해서 추구하고 알고 싶어했던 정렬을 가진 사람이라고 디두모 도마를 평가할 수 있겠다.


 

3)교훈과 문제제기


 

도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의심.회의의 문제였다.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속 질문하여야 한다.


 

“주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갈 수가 있습니까?” 도마의 질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답해 주셨다. 도마의 질문이 없었더라면 이 위대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질문하고 있다는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비판하는것도 관심이 있다는것이다. 회의한다는 것과 불신앙은 다르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을 꾸짖지 않으셨다. 질문을 던지라. 그 질문을 통해 당신은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부활하신 주님의 정체를 나타내셨을 때 도마는 함께 있지 않았다. 주님이 역사하실 때 당신은 그 현장에 있었는가? 옛날에 경건한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들이 모이는 모임에 한번도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답했다.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도마는 무리들을 떠나 이탈된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함께 있을 때 주님이 오셨고 그는 의심을 불식할 수 있었다.혹 의심이 많아도 교회에는 빠지지 말라. 어느날 내가 그냥 만나버린 주님, 내가 어느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리자 한 순간의 체험이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였다.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제자/안드레(요1:35-42)


 

1)이름과 배경


 

안드레라는 이름을 번역하면 ‘남자’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를 합치면 ‘남자다운 사람, 사람다운 남자’가 된다.


 

안드레의 배경과 회심의 장면을 보자. 안드레는 나사렛 동북쪽으로 약 40Km,정도 떨어진 갈릴리 해안에 있는 벳세다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요나이며 어머니는 요한나였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자랐다(막 1:29). 그는 벳세다 출신으로 가버나움에서 성장했으며 형 베드로와 함께 어부로서 일했다. 안드레는 본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활동하다가 요한의 증거로 예수를 만났고 제자가 되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5-36)” 두 제자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를 좇게 되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신랑되신 예수께서 신부가 되는 우리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는 곁에 들러리 서는 것으로 기쁨을 느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요 1:38)” 예수님의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무엇을 원한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어디 계십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요한의 증거대로 저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 저분과 깊은 사귐을 갖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어디 계십니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듣고 좇아 갔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막 1:16-18)”


 

어부가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전 생계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포기할 정도로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었기에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안드레는 결단하였다. 안드레는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 초대 교회의 문서에 보면 안드레에게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2)인물과 성격


 

안드레는 사복음서에 세 번 등장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요 1:41-42) 성경 속에서 베드로는 언제나


 

중요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그에 비해 안드레는 가려져 빛을 잃고 있다. 그러나 안드레가 없었으면 베드로도 없었을 것이다. 안드레는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킨 일은 없다. 그러나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성도여! 여러분들을 가리켜 베드로가 되라하면 어려운 주문일지 모르나 우리가 안드레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감격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사랑하는 형제에게 메시야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이 나온다. 오천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 했을 때 빌립은 재빨리 계산하여 조금씩 나누어 준다하여도 이백데리나온이 더 들것이라고 말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8-9)” 이 말씀에서 안드레는 빌립처럼 절망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것을 아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그 적은 음식으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셨다. 결과적으로 안드레는 찾아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베드로를 찾아내어 예수님께 소개하고, 어린 아이를 찾아서 예수님께 인도하였다.


 

요한복음 12장에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말씀이 나오고 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수많은 군중이 소리치며 환영하였다. 이 무리 중에 유대인 아닌 헬라인 몇이 있었다. “저희가 갈릴리 벳세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나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데(요 12:21-22)” 이 말씀에서도 안드레는 같은 역할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안드레는 항상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소개하는 은사의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주님께 소개하는 역할을 한 사실들이 성경에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형제지만 베드로는 감정의 파고가 높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안드레는 감정의 기복없이 항상 자기의 일들을 조용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안드레는 큰 일은 못 벌인다. 베드로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각각 다른 성격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을까? 하나님 나라에는 베드로도 필요하고 안드레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믿고 예수를 알았지만 높아지는 베드로를 질투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안드레는 조용히 뒤에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어쩌면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더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다.


 

3)사역


 

안드레는 3년간 꾸준하게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할 때 그 120문도 중에 안드레가 있었다는 기록 외에 또 다른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사를 살펴보면 안드레는 자기가 들은 복음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세계를 향해 떠나는 선교사가 되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보면 그는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한다. A.D 260년에 기록된 책 가운데 안드레 개인의 삶에 대한 자서전과 같은 책이 있다. 그 책이름은 ‘안드레 행전’이다. 그책의 기록에 보면 그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특별히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 가운데 헌신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에 안드레는 러시아의 남부까지 찾아 간다. 스키티아라는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도 당한다. 그는 러시아에서 희랍으로 돌아왔다. 그리이스의 아가야로 와서 페투테라는 곳에 머물게 된다. 그는 거기서 에게테스라는 주지사를 만나 그의 동생과 부인에게 복을 전하여 믿게 한다. 이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주지사가 안드레를 죽이게 된다. 안드레는 처형 당하기 위해 X자형의 십자가 앞에 섰다. 이것을 안드레형 십자가라 한다. 주지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이라도 예수 믿는 신앙을 포기하고 그대의 목숨을 보존하라” 이때에 안드레는 “지사님이여,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잃지 마시오” 그는 숨을 거두며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 “오, 그리스도 예수님이여, 나를 받아 주소서. 내가 본 그분, 내가 사랑한 그분, 그분 안에서 나는 내가 되었나이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영원한 나라의 평안 가운데 이제 나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머릴로가 그린 ‘안드레의 순교’라는 그림에는 죽어가는 안드레 옆에 어린 소년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바쳤던 소년이었다고 한다.


 

4)교훈과 문제 제기


 

안드레의 교훈은 ‘개인 전도의 중요성’이다. 개인 전도란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이 그리스도를전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당신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 그의 생애의 교훈


 

*결단력이다-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모든 것을버리고 따라 가기로 결단했다.


 

*감격이다-이 감격이 그로 하여금 영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자리에 서게 했다.


 

*한 사람의 비젼이다-곧 한 인간의 가치의 중요성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약하나 강하게 된 제자/베드로(마 16:13-20)


 

1)배경과 회심


 

베드로는 갈릴리 지방 벳세다에서 태어나 가버나움에서 살았다. 그는 안드레와 형제였고, 어부로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일찍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베드로는 정상적인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많은 유대인들이 기본적으로 회당교육을 받았던 것처럼 기본적인 교육만 받았던 사람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짧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늘 앞서가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바닷가에서 길러진 뱃사람으로서의 야성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적극적인 성격 등이 지도자로서의 기질로서 인격을 훈련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요한복음 1장에 안드레를 통해 처음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 게바는 수리아 말로 헬라어의 베드로와 같은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석’은 무게가 있고 든든하며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베드로의 성격과 기질에는 맞지 않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너를 바위라 하리라”하셨을 때 옆에 있던 안드레는 속으로 부정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 본인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희망의 약속이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생애에 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지금 베드로라 말씀하지 않고 “장차”라는 말씀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가능성을 보셨던 것이다. 자기 생애 가운데 처음으로 자기를 믿어주고 자기에게 기대를 걸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시몬 베드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베드로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옛 이름이 시몬이고 새 이름은 베드로라는 사실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실망시킬 때마다 주님은 ‘시몬아!’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 이유는 베드로 자신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다. 주님은 그와 동일하게 우리도 불러 주시고 새 이름을 주시고 새삶을 살게 하신다.


 

2)소명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 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막 1:16-18)” 막 1:14을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 ‘요한이 잡힌 후’라고 기록하였다. 누가복음 5장 1절 이하에는 베드로를 부르시는 말씀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밤새워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낚아 올리지 못했던 베드로는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된다. 베드로는 이 사건 이전에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았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그의 장래를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신을 알고 바닷속 비밀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무릎꿇고 고백하였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앞에 자기의 전 생애와 시간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3)교훈과 문제 제기


 

베드로는 변화무쌍한 격정의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굉장히 강한듯 싶으나 속으로는 아주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은 먼저 하고 행동은 나중에 하는 사람이었다.이런 사람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사실 여러모로 재고나서 그제야 시행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교회 내에는 안드레와 같은 세심한 사람도 베드로와 같은 다혈질적인 사람도 필요하다.


 

마태복음 14장 25절 이하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베드로를 걸어오게 하신 사건이 나온다. 두려워 하며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나로 명하여 이 바다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부탁한다. 이일로 베드로는 ‘믿음이 적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으나 그는 자기 믿음을 표현한 일례가 되었다. “믿음없는 자여”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에게 서서히 위험이 닥치기 시작하자 하나 둘 군중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말하며 자신의 뜨거운 신앙을 고백하였다. 변화산에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을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다. 그는 솔직하고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위대한 고백을 남겼다.


 

예수께서는 어느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이신 후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말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주님의 호된 질책의 말씀을 듣는다. 감정적인 사람은 이와같이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베드로는 “결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했다가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조른다. 이상의 일들을 통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위대한 결단과 신앙 고백의 사람, 다혈질의 실수많은 사람. 이 두가지 양면의 모습이 베드로의 참모습이다. 시계추가 이끝에서 저끝으로 가는 것처럼 베드로의 생애는 이끝에서 저끝으로 움직이는 예측불허의 생애였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훈련시키시고, 실패할 때 다시 그를 붙들어 일으키셨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기도하실 때 그는 깊이 잠들어 버렸다.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을 때 칼로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런 용기의 일면이 있는가 하면 그는 금방 작은 비자 앞에서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나약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이해와 공감이 가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후회, 자기 연민, 자기 학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울면서 돌아왔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서 입술로 주님을 부인했을지라도 울면서 다시 돌아와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은 베드로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하였다. “네가 이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세 번 주님은 물으셨다.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한다. 주님은 친구들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양을 치는 사역을 그에게 맡기셨다.


 

3)사역과 죽음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복음서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주 담대한 사람, 균형잡힌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 변화는 성령이 가져오신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간의 삶의 경험이 그에게 성숙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도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인 복음전도의 문을 열었다.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13장에서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찾아가 전도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인물이 되었다. 베드로는 후에 고린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다.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이스를 말한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벧전 5:13)”이것은 문자 그대로 바벨론을 의미하지 않고 로마를 의한다. 그 로마에서 베드로는 순교의 잔을 마셨다. 오리겐이 쓴 기록에 보면 “나는 감히 주님이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의 모습 그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죽여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여 찬송하며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4)교훈과 문제 제기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성숙할 수 있는가? 이것이 베드로의 생애가 남긴 교훈이다.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는 나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동시에 내가 가진 장점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기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사랑스러운 제자/요한(요일 4:7-16)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에 의하여 쓰여진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다른 제자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자신의 이름은 한번도 밝히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더라(요 13:23)” 그는 주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기에 ‘나, 요한’이라는 자신을 나타내는 표현보다는 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인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리우고 싶었던 것이다.


 

1)이름과 배경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름만 밝힐 뿐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몇번 성경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십자가까지 따라간 여인들 중의 하나가 요한의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신앙의 감동에 있어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요한은 야고보, 안드레, 베드로 등과 더불어 가버나움 출신으로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졌다. 요한의 가정은가난한 서민은 아니었다. 종을 거느리고 있었고, 널직한 집이 있었으며 또 대제사장 가야바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고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집안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물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가 되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는 요 1:35 이하를 통해 알 수 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요 1:35-37)”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지내다가 어느날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좇게 되었다. 그 좇아오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두 제자는 무엇을 원한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은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는 단순한 이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된 바로 그분과 사귀고 싶어했던 것이다. 어디에 사시는가를 확인해 두고 그분과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고 싶어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요 1:39)”


 

2)인물과 성격


 

요한은 대개 “사랑하시는 제자”로 주님에게 불리워 졌다. 그 외에 특이하게 붙은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우뢰의 아들”이다. 요한은 처음에는 우뢰와 같이 성격이 급하고 거친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에게 의하여 ‘사랑스런 제자’로 바뀐 것이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요 9:49)” 요한은 자신의 편이 아니면 다 적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었다. 열정을 가진 사람은 항상 이런 외골수로 빠지기가 쉽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니라(눅 9:50)” 예수님은 요한을 나무라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 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1-54)” 사마리아 고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괄세를 하니까 화가 나서 “선생님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을 몽땅 불태워 버립시다”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장 실감나게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변했는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나중에 요한이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주님을 만나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가 부활의 현장을 확인하였다. 21:5 이하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 주님이 찾아 오셨다. “바로 주님이시다” 요한은 소리치며 뛰어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제일 빨리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3)사랑에 관한 교훈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와 요한 1서, 2서, 3서, 계시록 가운데 요한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위대한 구절은 사랑에 관한 말씀들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요한일서 4장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의 체험을 사랑에 관한 교훈으로 네 가지로 정리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이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함이라(요일 4:9)”/하나님의 사랑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나타내셨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 거하게 된 사랑은 이제 형제에게 나타나야 한다.


 

사랑은 용감해질 수 있다. 사랑할 때에 희생할 수 있다. 요한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두가 흩어지고 달아날 때에 요한만은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다. “요한아, 내 육신의 어머니를 네가 모셔다오” 예수님은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4)그의 죽음


 

초대 교회 선교 시 개척자의 역할을 베드로와 요한이 담당한다. 사도행전에 바울이 등장하기까지 처음 절반의 역사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그후에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게 되고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밧모섬으로 귀양을 간다. 그 밧모섬에서 기도하던 중 어느날 성령이 그를 감동하시며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그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다.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는데 그때가 A.D.98년이었다. 그는 에베소에서 자기 최후의 사역을 한다. 이미 다른 모든 제자들은 순교의 잔을 마셨다. 그는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제자로 불리워진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순교자였다. 역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에서 또 한번 잡힌다. 그래서 독사굴에 집어넣고 꿇는 물에 던졌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를 살리신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최후에 그는 들 것에 실려서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앉혀 놓으면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간곡하게 설교하였다. A.D.100년 경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5)교훈과 문제 제기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의 주님과 깊이 교제하여야 한다.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한다.


 

+사랑은 실천할수록 증가한다.


 

충성스러운 제자/야고보(마 20:20-28)


 

1)배경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였다. 세베대의 아들이었으며 직업은 요한과 같이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좇아 갔다. 그는 큰 배도 소유했으며, 일꾼들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동생 요한과 더불어 당대의 대제사장 가야바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배경을 중심으로 그가 비록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위치에서 재산도 있었으며, 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고보는 어느날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부르심이 들려 왔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 나섰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전 생애를 바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2)인물과 성격


 

성경은 야고보와 요한을 항상 같이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꼭 형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다른 형제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였기만 성경은 이들을 언제나 같이 다루고 있지는 않다. 야고보와 요한이 늘 같이 행동한 것으로 복음서에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아주 잘 어울리는 형제들이면서도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 3:17에 예수님은 이들 형제에게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들은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형제였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대단히 비장하고도 고독한 행진을 하고 계셨다. 예수 일행이 길을 가다가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을 알아 보기 위해 예수님은 먼저 사자를 사마리아인의 촌에 들어가서 살펴보게 하셨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이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해서 “예수님을 괄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립시다”라고 제안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두 형제는 천부적으로 불같은 성격을 다같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야고보는 열정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이 열정이 있기에 화를 내어도 무섭게 내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께서 정권을 잡으셨을 때 그의 아들들로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2)”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시는데 이 제자들은 다가올 영광만을 생각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는가? 우리는 영광을 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주님은 이루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광을 원하기 전에 주님께서 나에게 만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삶을 허락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우리는 달게 받을 수 있을까? 두 형제와 그 어미가 예수님께 청한 소식을 전해 들은 나머지 열 제자는 모두 분하게 생각했다. 똑같은 욕구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같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자신이 높아지고, 앞서려는 끈질긴 인간적 야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높아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을 많이 갖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할 진정한 위치는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리이다. 성경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높아지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루시퍼의 죄악이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계급의 사람도 바리새인이었다. 그들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시장에 가면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가슴을 내어놓지 못하고, 이웃의 발을 닦기 위해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교훈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서도 그런 모습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도 그런 모습은 아직도 굳건히 자리하고 있지 아니한가?


 

야고보는 그가 열정적인 기질을 가졌기에,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자연히 이 사람은 앞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잘못 되어지면 남을 짓밟는 선하자 못한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잘 사용하면 그는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훈련시킨 사람은 야고보를 포함한 베드로, 요한이었다. 이 세 사람이 제자의 핵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사람은 장차 초대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서 훈련를 받은 것이고, 또 실제로 지도자가 되었다. 사도행전에 들어가면 그는 이제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광 스러운 지도자였기에 지도자로서의 댓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게 된다.


 

3)생애와 죽음


 

야고보는 어떤 특별한 재질이나 업적은 갖지 못한 제자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그곳에 야고보도 함께 있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베푸실 때,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할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 야고보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야망이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비판만 할 수 없다. 그는주님을 향해서 야망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던 것이다. 주님이 있는 곳에 언제나 그는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간다. 우리가 남을 짓밟는 야망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올바른 진리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 못하는것은 더 큰 문제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선한 야망을 가져보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장 신실하게 받들며,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선한 의미의 야망을 갖는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는 지중해 영역까지 가서 전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했다고 한다. 그는 실로 많은 지역을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모든 힘을 다했다. 그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다. 때는 A.D. 44년이었다. 성경에 야고보처럼 죽음이 명확하게 표현된 제자들이 없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헤롯 왕은 교회 중 몇사람을 해쳐야만 기독교가 더 이상 세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야고보를 죽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의 전파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야고보를 희생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말씀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 아닌, 요한의 형제 야고보라고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순서를 바꾸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는 잔인하고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생애를 마치게 된다. 요한은 어떠한가? 제자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았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야고보는 일찍 죽게 하시고 요한은 가장 오래 남겨 두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두 사람의 삶은 다같이 귀중하다. 우리는 죽음의 형태를 놓고 누가 낫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은 모두 귀하게 보신다. 그의 죽음은 선교의 위대한 밑거름이 되었다.


 

4)문제 제기


 

야고보의 삶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


 

*그가 육신적 야망을 극복한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는 주님을 바라 보았다. 우리도 끝까지 주님만 보아야 한다.


 

*그는 주님을 바라 보면서 계속 따라 갔다.


 

작은, 그러나 꼭 필요했던 제자/야고보(마 10:2-4)


 

1)이름과 배경


 

야고보라는 이름은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성경 속에도 야고보란 이름이 많이 나타난다. 성경 본문을 통해 이 야고보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세사람을 생각해보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이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성경에 나타난 율법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를 놓고 예루살렘 교회에 회의가 열린다. 13절 이하에 야고보가 일어나 교리적이고도 명확한 발언을 한다. 12장에서 이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죽었고, 여기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기 야고보가 사촌동생이라고 강조한다. 요한복음 7장에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억지에 대해 우리는 일일히 구구한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 7:1-4)”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공개적으로 활동하실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지상 사역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다. 그러한 야고보가 어느 때 어떻게 변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린도 전서 15장 4절 이하에 나타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이 말씀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보여 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이었다. 이때의 야고보는 결정적으로 자기의 형제였던 그 예수님이 단순한 육신적 형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사란 것을 결정적으로 신뢰하고 믿고 그 삶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세베대의 아들도, 예수님의 동생도 아닌 제 삼의 야고보가 있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 10:2-4)” 위의 명단에서 야고보는 알패오 아들 야고보로 열 두 제자의 명단에서 아홉번째로 등장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명단 가운데 야고보가 둘임을 알 수 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이다. 세베대의 아들보다 키가 작았으므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기도 했다.


 

2)교훈


 

야고보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그가 어떤 말을 했다거나 어떤 질문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문서들은 그가 열심당원 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조국을 건지고자 나섰던 “민족 독립 운동의 투사”들이다.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유다....(마 10:2-4)” 제자들의 기록상황을 보면 둘씩 형제끼리, 혹은 친한 사람끼리 짝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 바로 뒤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나오는데 그만 형제라는 말이 안 나온다. 그들이 형제였을까 의심이 생기는데 성경의 정황을 살펴보면 형제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제 야고보 다음에 나오는 사람들을 주목하여 보라. 다대오가 나오는데 그는 열심당원이었다. 이 다대오를 다른 곳에서는 유다로 기록한 곳도 있다. 그의 본명은 유다 다대오이다. 그 다음에 가나안인 시몬과 가룟 유다가 나온다. 이들 모두는 열심당원 출신이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제자들 중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들이 열심당원들이다. 행 1:13을 보면 제자들의 이름이 계속 기록되다가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 이 둘을 분리시키지 않고, 같이 묶어 기록한 점을 보아 이들이 형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 야고보는 과거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정치적인 열망을 신앙적인 열망으로 승화시켜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였다. 우리는 이따금 애국심이 신앙심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국자는 다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는 민족주의보다 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가진 민족에 대한 이상은 이것이 더 넓어져서 세계를 향한 비젼이 되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선교나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와 야고보가 형제라면 이들의 관계는 참으로 흥미롭다. 마태는 세리로서 친로마주의자였고 야고보는 열심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다. 모든 계급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다 제자삼고 싶으셨던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치는 사람도 사랑하고,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없었던 관리도 사랑하셨다. 두 종류의 사람들을 다 포용하심으로 그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다.


 

야고보는 키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여 매사에 불평이 없었다. 야고보는 겸손하여 나서기를 싫어했고 열심으로 주의 사역에 협력하였다. 사도행전에 아리스다고라는 사람이 나온다. 이 무명의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로마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자진해서 수감되었다. 바울이 무인도 섬에 도착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그는 바울 곁에 있었다. 바울이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 아리스다고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실로 우리 중에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가? 겉으로 거창하나 실속이 없는 이보다 말없이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그냥 설교 시간에 앞자리에 앉아만 있어주는 사람. 목회자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가? 작지만 꼭 필요했던 사람이다.


 

3)죽음과 교훈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후일에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다.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많이 기도를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리아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하게 된다. 돌에 맞아 그가 죽지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와서 야고보를 켜서 죽였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로마에 야고보가 묻힌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지금은 “거룩한 사도의 교회”라고 바꾸었다.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그것은 작은 것부터 성실성을 나타내어야 한다. 별로 요란스럽지 않으나 열심히 뜨겁게 속으로 모든 말씀에 일언반구없이 헌신했던 사람. 야고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여 큰 것에도 충성하는 자가 된 제자였다.


 

희생적 결단을 내린 제자/마태(눅 5:27-32)


 

1)이름과 배경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한 반면 마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그를 레위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 2:14)”


 

레위는 구약의 제사장 지파를 말씀한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다. 마태의 부모는 새롭게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과거 레위 족속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바램을 아들에게 가졌다. ‘너는 커서 훌륭한 제사장이 되어라’ 이런 바램 때문에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태의 본 이름은 레위였다. 마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이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가버나움 출신이다. 예수님은 가장 많은 사역을 여기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얻지 못하셨다. 그많은 기적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가장 냉담했던 마을이 가버나움이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3-24)” 예수님께 대하여 지극히 냉담하고 배타적이었던 가버나움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마태였다. 마태의 아버지는 제사장이 되라는 의미로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되기는 커녕 세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로 연결시킬 가능성이 상당히 짙다. 그 이유는 세리는 아무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도 계산을 잘해야 하며, 장부를 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 그 당시 세리가 되기 위한 사람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 당시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언어는 적어도 필수적이었다. 그 당시 제일 유행하던 말인 아람어와,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어까지 요구했다. 네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면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가능했다는 증거이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배경을 타고, 아버지의 그런 바램 속에서 자랐다면, 틀림없이 제사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은 마태는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세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는 그 당시 사회 속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미움을 받고 사는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세리는 로마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의 관리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이 사람들은 친로마 적 경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민중들에 의해 매국노로 배척을 받았다. 둘째로 세리들은 대부분 부정직했다. 과중한 세금으로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세리들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일부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다.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그의 직업이 가장 배척받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죄인과 창기와 세리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하였다. 이런 삶의 배경을 가진 마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이 말씀 속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은 마태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 밖에 없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받은 새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불러오던 옛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던 까닭에 “레위”라고 불렀던 것이다. 레위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하시고 다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29,30)” 마태는 예수님을 좇게 된 사실이 기뻐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도 함께 동석하였다. 이때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다. 마태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따라나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요청하신다. 당신은 마태처럼 따라 나설 수 있는가? 마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기로 결단한 그날 마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아가면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감격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을 잔치로 표현했다. C.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잔치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기쁨! 그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시작되었다. 오천 명을 먹이던 그 자리도 사실은 잔치자리였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과 이별을 하면서도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마디로 잔치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을 다시 읽고 공부하면서 “예배는 축제이며 잔치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전통적인 의미없고, 내용없고, 생명없는, 일종의 형식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춤추고 노래하는 잔치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제자들이 함께 어울렸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을 즐기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 예배에 있어 형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형식은 반드시 생명의 환희가 차고 넘치는 잔치여야만 한다.


 

우리가 마태를 통해 배워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마태는 세리였는데 이 세리를 제자의 하나로 받아들인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세리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를 보였다. 그 당시에 민중을 착취하고,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있는 세리들을 예수님은 무섭게 책망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리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 것이다. 세리라는 그 인간, 그들이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인간을 주님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리를 사랑하셨다. 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다.


 

2)생애와 죽음


 

성경에는 마태가 부름을 받은 다음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한마디도 없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마태는 유대 역사에 정통했던 사람이었다. “구약성경이 이렇게 성취되었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는 어떻게 유대의 역사에 관해서 그렇게 잘 알 수 있었을까? 그는 제사장 집안에 태어나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육신의 안일과 평안을 좇아 부모의 바램과는 반대로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바꾸어 위대한 복음서를 쓰게하셨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이것은 철저히 유대 역사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신 역사를 가장 정교하게, 날카로운 필치로, 그리고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에디오피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애굽으로 가던 길에 핍박자들을 만나 창에 찔려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마태는 자신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이와 같은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3)교훈과 문제 제기


 

마태는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위하여 희생적 결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확신하여야 한다.


 

죠지 베브리 쉐아(G.b Shea)는 시카고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자였다. 그는 어려서 부터 예수를 믿었었는데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얻고자했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마음은 쓸쓸해지고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어느날 시카고의 한 운동장에서 젊은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열고 있는 전도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주님 앞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헌신하였다. 집에 돌아와 얼마전 예수 믿는 어머니 친구가 작곡해보라고 주었던 가사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다시 전속 계약을 하면 지금까지 받았던 금액의 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정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미안하지만 오늘밤 저는 제 목소리를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제 목소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 질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멜로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곡을 완성시켰다. 그 곡의 가사는 이러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름없이 빛없이 섬긴 제자/유다 다대오(눅 6:13-16)


 

1)이름과 배경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다. 제롬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였다. 이 제롬은 다대오를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유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흔히 혼동을 일으키지 않으려 “유다 다대오”라고 부른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자살한 이후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를 보호하기 위해 유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제자들 사이에서 통용된 이름이 유다였기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대로 ‘유다’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였다. 영어 성경에 보면 마태복음 10:3에 ‘레비어스’라고 쓰였다. 그


 

렇기 때문에 제롬이라는 초대 교부는 ‘세 이름을 가진 사나이’라고 불렀다.


 

2)인물됨과 생애


 

성경에는 열 두 제자의 명단을 언급할 때를 제외하고 유다 다대오를 말한 곳이 단 한번 나온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나눈다. 이 만찬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시고 그 말씀은 16장까지 계속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중간중간에 제자 몇명이 나와 예수님께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말씀들이 14장에 나온다. 이중에는유다 다대오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질문은 누가 하는가? 어떤 상황에 대한 관찰력이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대오의 질문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이질문은 단순하게 보면 지적인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교적 관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믿도록 해야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 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선교적 차원에서 보는 각도와도 통할 수 있다. 포용력이 넓은 제자의 이미지를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상은 질문을 통한 유다 다대오 이해의 전부이다. 이번에는 이름을 통해 인물됨을 생각해 보자.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 “사랑스러운”이다. 다대오라는 말의 어근은 “도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이 말의 뿌리는 “찬양”이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야스는 본래 히브리 명사인 「렛」에서 나온 것으로 「렛」은 ‘가슴’이라는 뜻이다. 이 가슴은 육체적인 가슴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정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다. 그러면 레비어스와 다대오 이 두 별명은 어떤 연관성을 지녔는가? 이 사람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다. 이상이 성경에서 다대오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우리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의 자료들을 살펴보는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자료들은 성경보다 우선할 수 없다. 다만 보조적인 자료로서 참고할 뿐이다. 초대 교회 문서 중에 열 두 제자를 비교한 것이 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룟 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룟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룟 유다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향하여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때에 이 다대오는 조용히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다른제자들이 분쟁을 일읕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제자가 바로 다대오였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에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이름 값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반면에 유다 다대오는 이름 값을 훌륭히 감당했던 제자였다. 이 문서에서 보면 다대오는 모든 제자들 가운데 사랑과 인정을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시인은 노래하였다.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벽을 쌓으려고는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유다 다대오와 같은 제자가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3)죽음


 

유다 다대오는 훗날 시리아로, 아라비아로, 페르시아로 찾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 그는 특별히 아르메니아에서 주된 활동을 벌였다. 바돌로매와 더불어 동역하면서 그 도시 에뎃사에서 놀라운 선교의 활동을 펼쳤다.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는 다시 해외에 선교하러 나갔다가 시리아에서 칼에 맞아 순교하였다.


 

4)교훈과 문제 제기


 

예수님은 왜 다대오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밝은 면을 바라보는 습관 때문이다.


 

$.삶의 동기에 있어 이기적인 욕망보다는 이타적 사명이 얼마나 내 사람의 동기가 되고 있는가?


 

$.찬양과 감사를 생활화하는 삶의 태도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여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19-20)”


 

민족에의 열망을 주께 바친 제자/가나안인 시몬(행 1:1-8)


 

1)배경과 인물


 

열 두 제자 가운데 거의 성경에 자료가 없는 제자가 바로 가나안인 시몬이다. 성경에서 그의 배경에 관한 자료를 얻자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료는 두 가지 밖에 없다. 그 하나는 그가 가나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마 10:4, 막 3:18에 ‘가나안인 시몬’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 하나의 소재는 눅 6:15, 행 1:13에 ‘셀롯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눅 6:15)” 이 말씀에서 ‘셀롯’이라고 표기한 옆에 아라비아 숫자로 1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경 아랫 부분에 그 해석을 ‘열심당원’이라고 씌고 있다. 이 정도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의 전부이다. 열심당이란 예수님 당시에 아주 극렬한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이다. 이스라엘에는 ‘마사다’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이 ‘마사다’는 사해바다를 따라서 내려가면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돌아가신 이후에 유대 나라는 로마의 강압적이고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태인들은 로마에 잡혀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적인 수난을 겪으면서 남은 유태인들은 로마에 대하여 끝까지 항전할 것을 선언하고 마사다라는 높은 산에 올라간다. 그곳은 헤롯의 헤롯 궁전의 잔해가 남아 있었기에 그 안에는 피나처도 있었고, 비가 오면 빗물을 담아서 연못처럼 모아 둘 수 있는 천연석으로 된 못도 있었다. 이곳은 유태인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었다. 메마른 사막 지대의 대단히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로마에 항복하기를 거절하고 그곳에서 로마 병사들과 싸움을 하였다. 패배는 정해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절대 항복할 수 없다는 민족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끝까지 항전하였다. 마지막 싸움에서 승부가 결판날 때에 로마 병사들에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들은 그들이 올라오기 전에 천여명이 집단자살을 하였다. 지금도 유태인들은 징집되어 군대에 갈 때는 이곳 마사다에서 서약을 하게 된다. 마사다에 가보면 관광용품을 파는데 어느 물건을 사든지 물건마다에는 “마사다는 결코 두번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유태인들의 민족적인 자존심과 로마에게 끝내 질 수 없다는 절개를 끝까지 고백하고 죽어간, 그 장렬한 죽음의 자리가 마사다 언덕이다. 바로 이 마사다 언덕에서 끝까지 투쟁을 했던 이 당파가 열심당이다.


 

열심당의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B.C 167년경에 소위 신.구약 중간기라는 시대가 있었는데, 그 시기에 마카비 형제를 중심하여 역시 외세의 침입에 항쟁하여 민족을 지키려는 무리가 있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사에 자기 민족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지속되었다. 이들은 아주 극단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어 친로마적 성향이 있는 사람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죽여버리는 잔인성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작은 야고보 같은 사람도 열심당 출신이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열심당이라는 뜻인 ‘셀롯인’이라는 말은 안썼는데 이 시몬은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마 이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도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거나 그들의 일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시몬은 민족에 대한 긍지와 민족에 대한 열망이 가장 투철했던 사람이었다. 이 열심당에 가입하려면 불타는 애국심과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했다. 이러한 결심이 없으면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 정도가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자료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부분이 있다. 이 사람이 열심당원 출신이었다면 그 성격에 제자들과 많이 다투었을 성도 싶은데 전혀 그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시몬인 열심 당원이었던 반면에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던 번민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행 1:6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것을 가나안인 시몬이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을 언제나 메시야로 구세주로 증거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야관과 제자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개념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하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고, 예수님은 인간을 영적으로 구원하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야셨다. 이러한 배경으로 우리는 가나안인 시몬이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어 그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하에서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로 따랐는데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그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삼일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자 다시 가슴 부푼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 주님이 승천하실 때가 가까와오자 시몬은 물었던 것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때 예수님의 답변은 어떠했는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주님은 협소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셨다. 주님은 우리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신다. 그러나 주님의 차원은 민족보다는 훨씬 높다. 그는 세계를 보신다. 모든 인류를 억압하고 있는 죄로부터 해방하고 구원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더 깊은 관심이었다.


 

2)생애


 

초대 교회 문서들을 보면 열 두 제자 가운데 시몬은 가장 열심히 주님을 전했던 제자로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 시몬은 민족에 대한 열심을 지녔던 사람이다. 예수님을 만나 변화 받고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에 그는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문서들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에서 전도하고, 북아프리카, 에집트, 흑해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나아가 영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되었다. 영국은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나라이다. 시몬의 가슴에 붙었던 불이 영국인의 가슴에 붙음으로 복음이 세계로 증거되게 되었었다. 그는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다가 폭도들에게 붙잡혀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했다.


 

3)교훈과 문제 제기


 

*자기의 개인적 야망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했던 사람이다.


 

*나와 이념과의 조화를 이룬 사람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더 큰 목적과 사역, 위대한 이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쳤던 사람이다.


 

구원받지 못한 제자/가룟 유다(마 27:1-6)


 

이스라엘의 12지파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12제자는 신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과 주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제자들의 순서를 다룰 때 예수께서 부르신 순서대로 하지 않고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다루고자 하는 제자는 가룟 유다이다. 가룟 유다에게 붙은 별명을 붙인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강도. 배신자. 도적.위선자’등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라고 정의하였다. 성경을 통해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믿는 자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 이러라(요 6:63-64)”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군중들이 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다양한 환경 속에 동참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의 고백이 없었던 자들에게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말씀하시면서 가룟 유다를 명백하게 지적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처음부터 신자가 아니었음을 밝혀주는 성경적인 증언이다. 그는 단지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기록이 들어 있는 장이다. 남이 먼저 씻겨주기를 바랬던 제자들은 아무도 먼저 씻겨 주지를 않았다. 그때에 주님이 손수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씻겨 주셨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제 발을 씻기실 수 있느냐고 만류했다. 그때에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말씀하셨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생의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근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발씻음은 부분적인 죄로써 죄의 자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침에 아무리 발을 깨끗히 씻고 나가도 저녁에 돌아오면 나도 모르게 발이 더렵혀져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세상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오염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발씻음의 의미는 요한일서 1:9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가룟 유다의 교훈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는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1)이름


 

가룟 유다라는 이름에서 가룟은 지방이름이고 유다는 그의 본명이다. 그 의미는 ‘찬양’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이름이 가룟 유다 이후로 어느 누구도 그 이름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유다지파의 시조는 유다이다. 신구약 중간기에서 유대 민족을 민족적으로 구출하기 위하여 싸운 영웅 가운데 유다 마카비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다라는 이름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 다대오”가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유다라는 이름이 얼마나 사랑받고 보편적인 이름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2)배경


 

가룟이라는 지방은 헤브론 지역에서 수마일 내려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2제자 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이다. 오직 유다만이 가룟 출신이다.우리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그 삶을 사는 모습이 우리 주변 인간관계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3)인물됨


 

요한복음 16장 6절에서 유다를 돈궤를 맡은 자, 즉 회계의 업무를 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룟 유다가 위선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면 누가 돈궤를 맡겼겠는가? 외관상 유다는 모두에게 신임받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 13:21에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하셨을 때 제자들은 “나입니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유다를 지목하여 말하지 않았다.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 그가 누군지 알고 보니까 나쁘다 말하지만 외관상에는 그의 간교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과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이런 외모와는 달리 그의 속마음은 어떠했는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 그는 마리아가 자신의 옥합을 깨 예수님께 부을 때에 분내어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많은 이웃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한다. 내적인 자신의 모순을 은폐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유다는 철저하게 가면을 쓴 이중 신분자였다.


 

4)주님을 배반한 까닭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사랑했고 그 약점을 마귀가 여지없이 공략한 것이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조각을 받은 후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 13:27)” 마귀는 처음에는 생각을 넣는다. 그후에는 자신이 직접 들어간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 6:70)” 이것은 가룟 유다가 마귀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귀에 사로잡혀 마귀의 일을 할 것을 주께서는 먼저 보고 계셨다는 것이다.


 

5)그가 제자로 선택된 이유


 

마가복음 14:21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그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첫째는 “지상 교회는 영원히 가룟 유다와 같은 비극적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예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왕이 되지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지 않으시자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 떠나갔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밭과 같아서 알곡과 쭉정이가 함께 자란다.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 속에는 네가지 종류의 밭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길가에 떨진 씨앗을 새가 와서 쪼아 먹는다. 가시밭에 떨어진 씨는 가시의 기운 때문에 결실치 못한다. 돌짝밭의 씨는 돌 때문에 더 자라지 못한다. 모든 장애요소 즉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의 정체는 바로 마귀이다. 배교의 현상이 나타날 때 놀라지 말라. 오히려 깨어 기도하라.


 

둘째 이유는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악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 주신다. 악은 언제나 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의 술수를 끝내 이기시고 선을 이루신다.


 

6)교훈과 문제제기


 

*가면을 벗고 자신에게 솔직하여야 한다(고후 13:5)


 

*자기의를 버리라(사 64:6)


 

가룟 유다에게는 적어도 세번쯤은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 첫째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이 떡 조각을 받은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했을 때이다. 둘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하셨을 때이다. 셋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결정된 후 그것이 죄악인줄 알았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뉘우치기는 했으나 자살하고 말았다. 우리의 중심에 가룟 유다와 같은 잘못이 싹트고 있지는 않은가?



$.열 두 제자 보고를 마치면서..........

열 두 제자 모두는 죽었지만 그들의 삶의 결과는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그들 때문에 내가 신앙을 받고 감사하면서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전한 복음 때문에 세상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 제자들을 통해 주께서 내게 주신 교훈들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늘 요구하시는 헌신이 무엇인가를 주님 앞에서 대답하자. “주님! 나도 내 몫을 다하고 삶을 끝마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