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주선애 교수 간증(30)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7-19 14:42
조회
140



주선애 (30)         묘향산 관광이나 하라고? 차라리 금식기도회!





북에서 참석 요청한 아리랑 축제에 300명 중 90명만 참석한게 문제 돼


예정된 봉수교회 방문일정 틀어져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002년 평양 방문 당시 고려호텔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한민족복지재단에서 ‘6·15회담’ 기념으로 북한의 봉수교회 성도 300명과 한국교회 지도자 300명이 함께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한민족복지재단 전 이사장이었던 이성희(연동교회) 목사님의 배려로 방문단에 합류하게 됐다. 54년 만에 방문하게 된 내 고향.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볼 마지막 기회였다.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서해로 나갔다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아니라 평양을 향해 직진하듯 날아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북한 땅을 내려다보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산에는 푸른색이 안 보였고 붉은 산등성이들과 바둑판처럼 몰려 있는 집들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농사짓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땅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착륙한 비행장엔 커다란 벤츠 버스 10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남한에서도 보기 드문 고급 버스였다. 짐 조사가 대충 끝나자 나는 버스 앞자리에 앉았다. 열심히 북한 사람을 구경하려고 확 트인 앞 창문과 옆 창문을 번갈아 가며 내다봤다. 이동하는 길목엔 자동차는 하나도 안 보이고 이따금 시커먼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얼마나 고생한 얼굴일까’ 싶어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30분 정도 주행하는 동안 한 사람도 우리 일행이 탄 차를 쳐다보지 않았다.

큰 버스가 10대나 줄지어 가는데 몇 대인지,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한 번쯤은 호기심으로 볼 만도 한데 사람들은 기계처럼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말하는 자유는 물론, 보는 자유조차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해 연동교회 권사님과 함께 9층 방을 잡았다. 내가 자라던 신양리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양 시내를 완전히 밀어버리고 평지를 만들어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평양 기차역이 얼마 멀지 않고 대동문에서 보통문으로 가는 큰길에 호텔이 자리 잡은 걸 보니 내가 다녔던 서문 밖 유치원, 정의여자고등학교도 어디쯤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낮은 언덕들이 많이 있어 장대재 남산재 오동포재로 불리던 곳에 벽돌집 교회당이 우뚝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됐고 그 위엔 크고 웅장한 건물만 서 있었다.

건물 담벼락에는 큰 글자로 쓴 구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어버이 수령님은 살아계신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미제(美帝) 침략자들을 섬멸하라.’ 사거리 한복판에 여순경이 수신호로 교통정리 하는 모습은 한국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그날 밤은 대한민국 축구팀의 월드컵 8강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방마다 텔레비전은 있었지만, 북한 선전만 나왔다. 월드컵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내려와 총무 목사님께 축구 경기 결과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은 중국 베이징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4강에 진출하게 됐답니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와!”하고 소리치며 서로 껴안고 기뻐하며 야단이 났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딴 세계 사람들 같았다. 

그때 공지가 전달됐다. 어젯밤 참석을 요청한 아리랑 축제에 300명 중 90명만 참석한 게 문제가 돼 예정된 봉수교회 방문 대신 묘향산 관광을 간다는 거였다. 한 목사님이 외쳤다. “우리가 묘향산에 관광이나 하려고 왔습니까. 차라리 여기서 금식기도회를 하면 어떻습니까.”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