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가수 남진의 간증(11)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3-01 16:02
조회
80




남진 (11)     인기 절정일 때 해병대 군복에 반해 자원 입대




1969년 월남전 참전 위해 부산으로, 10대 소녀팬들 따라와 눈물


…1년 복무기한 마쳤으나 연장 신청










[역경의 열매] 남진 (11) 인기 절정일 때 해병대 군복에 반해 자원 입대 기사의 사진
남진 장로(가운데)가 동료 연예인 해병대원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다. 왼쪽은 가수 태원, 오른쪽은 진송남.






대학 선배들이 해병대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군복에 빨간 명찰을 달고 팔각모를 쓴 모습이 정말 멋졌다. 강하고 늠름한 모습을 보며 ‘군대는 해병대’라는 로망을 마음속에 품었다. 병역은 대한민국 남자의 3대 의무이지 않은가. 그래서 인기가 절정이던 1968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경기도 김포로 발령받았고 곧 서울 용산구 한남동 막사에서 복무했다. 당시 군 장성과 외무부 장관 등의 공관이 한남동에 있었다. 나는 외곽 경비 임무를 맡았다. 해병대이지만 특수부대 성격으로 내륙을 경비한 셈이다. 그러다 1969년 베트남으로 향했다. 월남전 참전을 위해서다. 10대 소녀팬들이 날 배웅하기 위해 부산까지 쫓아왔다. 나를 걱정하며 우는 이들이 많았다.



팬들에 둘러싸여 부산에서 출발할 때는 참 화려했다. 하지만 베트남에 도착해서는 일반인보다 더 엄하게 다뤄졌다. 목숨이라는 게 연예인이고 일반인이고 차이가 없지 않은가. 가수로서는 나와 진송남, 박일남이 베트남으로 향했는데 현지에선 뿔뿔이 흩어졌다.

베트남 다낭 옆 호이안이라는 지역으로 향했다. 청룡부대 2대대 5중대 소총수였다. 그 지역에 해병대 연대는 우리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피 터지게 맞았다. 선임들은 “사회에서 편하게 있다 왔다”며 나를 더 때렸다. 유명 연예인이었으니 곱게 보였을 리 없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온 선임들은 아주 살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보다 친해진 게 이들이다. 얼차려를 주면 받고 청소를 시키면 열심히 청소했다. ‘연예인인데’ 하며 잘난 척하거나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빠르게 조직에 녹아들었다.

해병대라면 베트남에 1년은 꼭 갔어야 했고 그 이상 머무르게 하지는 않았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 힘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난 2년을 머물렀다. 빨리 귀국하고 싶다는 이들과 달리 한국에 와서 초라하게 있기 싫었다. 한창 젊은 혈기여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찌 보면 대견하다.

베트남에 처음 갔던 1969년에는 나에 대한 기사가 많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2~3년을 활동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군대 생활 적응보다 더 힘들었다. ‘옛날처럼 화려한 명성을 다시 구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밤마다 찾아왔다. 아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이었다.

베트남에서는 병영캠프와 작전지역 외에는 외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나이에 여자 친구도 사귈 수 없는 베트남에서 지겨운 1년을 더 연장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지금도 감사하다. 만약 그때 한국으로 돌아왔으면 맥이 빠졌을 것이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한국에서 보고만 있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부대장도 흔쾌히 내 파병 연장 신청을 허락했다.

베트남에선 어머니가 담근 파김치가 제일 맛있었다. 한평생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 전우들이 많이 탐을 냈기에 그 파김치를 내 곁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호이안에는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었기에 군복도 제대로 입고 있을 수 없었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