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가수 남진의 간증(4)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2-19 12:52
조회
69




남진 (4)   ‘엘리트 어머니’ 늦은 귀가엔 피가 나도록 회초리





말썽 부리고 공부 안하는 건 용서…


1994년 돌아가신 뒤 그리움에  ‘어머님’ 노래  3년 동안 못불러












[역경의 열매] 남진 (4) ‘엘리트 어머니’ 늦은 귀가엔 피가 나도록 회초리 기사의 사진

남진 장로의 어머니 장기순 여사(사진 오른쪽)가 아버지 김문옥 전 의원과 함께 돌을 맞이한 남 장로를 안고 있다.
어머니 장기순 여사는 1905년생으로 서울 진명여고의 전신인 진명여학교를 나오셨다. 전남에서 태어나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다닐 정도였으면 인텔리 여성이라 불릴 만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뒤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지낸 교육자셨다. 어머니는 1946년 중앙대의 전신인 중앙여대를 설립하고 학장이 된 임영신 여사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런 어머니였으니 늦둥이 장남인 날 얼마나 신경 썼겠는가. 아무리 해도 안 되니 ‘남진이는 공부로는 방법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내가 가수가 됐을 때 가장 열심히 지원한 분이 어머니였다. 나도 자식을 키워보니 어머니는 참 훌륭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게 내겐 행운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교육 모두를 어머니에게 일임했다. 언론인이자 정치인, 기업인으로 바빴기에 집에 오는 날이 많지 않았다. 늦둥이 귀한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엄하게 키웠다. 혼도 많이 나고 매도 많이 맞았다. 학교에서 워낙 말썽꾸러기였으니 그럴 만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면 모범생이 될 텐데 유독 나는 말썽꾸러기들과 어울려 지냈다. 축구부나 연극부원, 학교 깡패들과 친하게 지냈다. 학교에는 불우한 친구도 많았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게 예사였던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은 대궐 같았던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다.

어머니께서 나를 가장 엄하게 혼 낸 것은 집에 늦게 들어올 때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날벼락이 쳤다. 그렇게 엄하지 않았다면 나도 친구들처럼 문제아가 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아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봐주어도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으셨다. 커다란 회초리로 따끔하게 맞는데 피가 날 정도였다.

“어머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 백날을 하루같이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손발이 금이 가고 잔주름이 굵어지신 어머님…”(남진의 노래 ‘어머님’ 중)

1994년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돌아가시고는 3년 동안 ‘어머님’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그 곡은 1986년 김중순씨가 작사하고 고봉산씨가 작곡했다. 마치 내 삶을 얘기하는 노래 같았다. KBS 가요무대에 나가면 꼭 부르던 노래였는데 감정이 북받치니 부를 수가 없었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말썽꾸러기였던 나를 위해 고생한 어머니가 지금도 무척 그립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다.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한 분이어서 그런지 종교적으로는 자유로웠다. 어느 종교를 믿더라도 열심히만 믿으라고만 했지 절에 다녀야 한다는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자애로운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연임이 틀림없다.

돌이켜 보건대 자식으로서 어머니에게 너무 큰 아픔을 드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세월이 지날수록 뼈에 사무쳤다.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어머니가 왜 날 키우다 쓰러지기까지 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남 7녀 중 여섯째인 내겐 누나들이 많다. 그중 제일 친한 누나는 바로 위 다섯째 누나다. 그 누나의 아들이 나보다 한 살 위다. 누나는 나처럼 예술을 좋아했다. 노래도 잘했는데 당시에는 점잖은 집 딸이 가수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수를 하지 않고 결혼을 했다. 내가 가수로 성장한 데는 다섯째 누나의 영향도 있었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