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가수 남진의 간증(12)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3-01 16:09
조회
81




남진 (12)      눈앞에 포탄 떨어지고, 야간 전투 땐 총알 스쳐가고




전우가 내게 총 겨눈 채 오발 사고


“하나님께서 목숨 살리셨수”… 1971년 귀국하자 인기 치솟아










[역경의 열매] 남진 (12) 눈앞에 포탄 떨어지고, 야간 전투 땐 총알 스쳐가고 기사의 사진
남진 장로가 1971년 베트남전 파병을 마치고 귀국해 어머니를 포옹하고 있다.






1969년 8월 한 종합일간지가 베트남까지 찾아와 취재한 뒤 크게 르포기사를 냈다.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폭양. 몸을 가누는 일 자체가 전쟁처럼 느껴지는 사막 같은 해안 모래밭에서 남진군은 침송강 부교 가설작업을 경비했다”고 월남전 참전 초기 나의 모습을 생생히 다뤘다.



베트남 다낭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내가 근무한 호이안은 다낭 바로 곁에 있는 지역이다. 다낭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연중 최저 기온이 20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더운 곳이다. 호이안에 도착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저녁밥을 먹고 맥주 한 캔 마시며 기분 좋게 쉬고 있는데 ‘휘이익’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휘파람 소리 같았다. 나는 무심코 서 있었는데 선임들이 “야, 포탄이다 엎드려”라고 소리쳤다. 신병이었던 나는 둔감해서 엎드리지도 않았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5m 앞에 포탄이 하나 떨어졌다. 모래에 툭 박힌 채로 팽이처럼 마구 돌았다. 불발탄이었다. 터졌으면 바로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더 용감하다고 하지 않는가. 전쟁터에서도 신병들이 더 용감하다.

어느 날 밤 작전 중이었다. 총알이 내 곁을 스쳐갔다. 맞아서 쓰러진 전우도 있었다. 그때가 잊히지 않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쟁터였다. 국내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는 작전현장에 나가서야 실탄을 나눠줬다. 전쟁터에선 내무반을 둘러보면 수류탄과 총알이 지천이다. 안전사고도 잦았다.

한 뼘 차이로 총알이 내 곁을 지나친 적이 있다. ‘탕’ 날아간 총알은 앉아있는 나를 지나쳐 내 곁의 수통을 뚫고 지나갔다. 그때 맞았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한 전우가 총기를 다루다 실수로 나를 겨냥한 상태에서 오발 사고가 난 것이다. 지금도 그 전우는 “내가 남진을 죽일 뻔한 적이 있어”라고 말한다. 나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살리셨슈. 살아서 좋은 줄 아슈”라며 농도 건넨다. 전우로서 둘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 있기에 만나는 게 즐거운 사이가 됐다.

나도 총기를 잘못 다뤄 동료를 죽일 뻔한 적이 있다. 만지는 게 총밖에 없으니 안전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운이 좋은 셈이다. 전방에서는 전쟁으로 죽는다면 후방에서는 안전사고로 죽는다. 살고 죽고가 한 끗 차이다. 당시에는 종교라는 것 자체를 몰랐으니 기도를 하지는 않았다. 생과 사가 모두 운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국제시장’에 내가 나온다.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가 나를 연기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나처럼 잘 구사했다. 나는 주인공인 황정민의 은인으로 묘사됐다. 영화에서 “가수는 남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참 재밌다. 제작진이 어떻게 그렇게 나를 잘 묘사했는지 궁금했는데 육군본부에 가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전쟁터에 있으니 연예인으로서 가치가 높아졌던 것 같았다. 1971년 귀국했을 때는 그야말로 나의 시대였다. 참전 전보다 인기가 더 좋았다. 축복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을 텐데 그 조급함을 참았다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시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베트남에 더 오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정리=김동우 기자 lov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