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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원 전 총리 "청년세대 행복의 가치 찾아가길"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2-11 14:47
조회
101




정홍원 전 총리


“수저 계급론 안타까워…청년세대, 행복의 가치 찾아가길”




하나님 은혜로 살아온 75년…“깨끗하고 따뜻한 사회 만드는데 교회가 역할해야”










정홍원 전 국무총리를 만나기로 한 건 ‘운명과 경주를 한 정홍원 스토리’(홍성사) 출간이 계기였다. 2015년 퇴임 후 강연 및 봉사활동을 하며 조용히 지내던 그는 지난해 11월 회고록을 출간했다. 부의 대물림을 희화화한 ‘수저 계급론’을 보며 “기성세대로서,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이런 현실을 개선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정치는 하지 않는다”는 공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행보로 비쳐질까 우려해 출판기념회도 열지 않았다. 책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개인사무실에서 정 전 총리를 만났다. 그는 앉자마자 책을 쓴 이유부터 설명했다.

“나도 흙수저였다. 포기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개인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중 회고록 출간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총리 재임 때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서 보니 많이 부족했습니다. 청년문제에는 정부의 책임도 반은 있어요. 하지만 청년들이 환경 탓만 하며 포기해선 안 됩니다. 우리 세대는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기본적으로 풍족한 시대입니다. 더 좋아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쟁하고 약진하려니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행복의 기준, 사고의 틀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흙수저였어요.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과 의욕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경남 하동 농촌마을에서 12남매 중 10째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와 성균관대 법대 야간과정을 졸업한 뒤 사법시험에 합격, 1974년 검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하고 논일 밭일 거들며 살았어요. 학교 다니지 말고 집안일 도우라는 선친을 겨우 설득해 경남중학교에 들어갔어요. 머물 곳이 없어 친구 집 다락방에 얹혀 살다 연탄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다 6년 만에 그만두고 사법시험을 준비해 합격했어요. 생각해보면 누가 나에게 권유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길을 갈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걸음은 내가 걸어간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멱살을 꽉 잡고 끌고 다니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검사로 재직하는 30년간 특수부 생활을 오래하며 굵직한 사건들을 많이 다뤘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 어음 사기 사건, ‘대도’ 조세형 탈주 사건, 한국 최초의 컴퓨터 해커 사건 등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지 아닌지, 어느 고등학교 출신인지까지 따지는 검찰 조직 문화 속에서 학력 때문에 차별당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재직기간 동안 검찰의 조직 문화 속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점을 물었다.

“그 무엇보다 ‘어떻게 정의를 실현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어느 쪽에 유리한가, 정파적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길로 가는 것이 옳은 길인가, 다수 이성의 판단에 합치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니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결론 내리기가 어렵지 않았어요. 저는 법이라는 칼을 갖고 군림하는 게 아니라 법이라는 앞치마를 두르고 봉사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검사의 길이라고 믿어요. 후배 검사들에게 정의롭지만 동시에 따뜻한 검사가 되어달라는 당부를 꼭 하고 싶습니다.”

“내게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총리 재임 중 매일 기도

검찰 조직을 떠난 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거쳤다. 정치권에 발을 디딘 건 2012년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장 때였다. 2013년 2월 박근혜정부의 첫 국무총리가 됐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총리직이었다. 이듬해 4월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많은 사람이 그의 총리 재임 중, 현장에서 봉변당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물세례 받고, 옷도 찢어졌죠. 유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총리로서 책임져야한다는 마음에 사의를 표명했지만 결국 후임자 문제로 한참을 더 있어야했지요. 그때는 하루하루가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총리가 되면서부터 ‘내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당신이 시키셨으니 지혜와 담대함과 건강을 주셔서 능히 총리직책을 감당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그땐 더욱 바라볼 곳이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사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혜를 주셨고, 처음에 외면하던 유가족들도 7~8번 가서 만나니 마음이 통해서 고맙다고 하더군여.”

정 전 총리는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최순실씨에 대해 설명하면 좋겠다는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이 이어졌다.

“당시 면담하면서 마음이 힘드실텐데 틈날 때 성경을 읽고 교회를 나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어느 한 교회를 나가는 게 부담이 돼 안 나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지금도 그 분이 언젠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고 의지하면서 위로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 전 총리는 부산 영도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기독교를 접했다. 영도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다. 검사 재직 때는 임지에 따라 옮겨다니다 경기도 성남 분당 할렐루야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은퇴했다. “직분 받을 자격이 없다”며 고사하던 그를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가 “자격을 갖춰 직분을 받는 사람은 없다”며 설득하고 신앙지도를 했다고 한다.

“부모와 떨어져 지내던 시절, 어린 마음에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그래서인지 그 신앙이 마음 깊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밤길 걸어갈 때도 어린 마음에 늘 ‘하나님, 나를 지켜주세요’ 기도하면서 갔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세파에 시달리면서 순수성을 잃고 교회를 자주 안 나갈 때도 있었는데 결국 다시 마음을 바로잡게 돼더군요. 지금도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서 첫 신앙을 갖게 하면, 결코 비뚤어지지 않고 결국 첫 신앙을 회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그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였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지금도 내 삶을 되돌아보면 비뚤어지거나, 딴 길로 가거나,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마다 어떤 방법으로든 나를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이끄셨기에 자신감을 갖고 상황을 뛰어넘어 한 단계 올라가고,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운명과 경주하며 살 수 있었지요.”

“교회가 어려운 이웃 돕고 베풀 때, 깨끗하고 따뜻한 사회 될 것”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개인사무실 책상에 놓인 성경을 읽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정 전 총리는 한국사회가 고속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정치 지도자부터 국민들까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명실공히 선진국이 되려면 깨끗하고 따뜻한 사회가 돼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불공정 문제로 많이 좌절하는데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모세대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자녀가 군대에 가면 근처에 방을 얻어 살고, 시험만 잘보면 된다고 편법을 쓰는 부모도 있다지요. 자녀를 죽이는 일입니다. 크리스천 부모라면 더욱 문제예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신앙관을 키워 줘야지, 인간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마음이면 교회를 뭐 하러 다닙니까. 하나님 믿는 사람이 자녀를 부모에 의존하는 약한 존재로 키우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는 퇴임 후 2년간 서울 마포구 산마루교회에서 노숙인과 예배드리며 식사 봉사를 했다. 요즘은 비정기적으로 찾아간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때도 예배를 드리고 노숙인의 발을 닦는 세족식에 참여했다. 그들로부터 도리어 위로를 받으면서, 정 전 총리는 남은 인생을 따뜻한 밥 한 끼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요새는 어려운 사람들, 또 남을 돕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낸다. 최근 손주를 돌보기 위해 아들 집과 가까운 옥수동으로 이사한 후엔 우유배달로 독거노인을 돕는 서울 옥수중앙교회 호용한 목사와 교제하고 교회에서 강연도 했다.

“가치를 물질에다 두면 끝이 없어요. 90억원 가진 사람이 10억원 가진 사람에게 ‘그거 주면 100억이 될 텐데’라고 할 정도로 부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남을 도울 때 상대방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에게 뿌듯함과 기쁨, 행복이 돌아와요. 베푸고 나누는 기쁨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실 긴 테이블 끝엔 큰 성경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매일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못 읽는 날도 있다”며 “요즘엔 신명기 8장 11~16절이 꼭 우리 국민에게 주시는 말씀 같이 느껴져서 자주 묵상한다”고 했다.

“100년 전 한국 상황은 초근목피로 상징됩니다. 지금은 11위의 경제대국이 됐으니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요. 세계 경제가 지난 50년간 6.6배 성장했는데 우리는 350배 성장했어요. 미국의 어떤 기자가 ‘대한민국은 로켓처럼 솟아올랐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잘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경제가 발전하니 도리어 감사를 잃고 교만해지고 늘 부족하다며 불평하는 게 아닌지요. 물질이 아니라 남을 돕고 베푸는 가치를 중시하고 하나님 정신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고 나누는 데 교회가 앞장선다면, 교회가 곧 대한민국을 변혁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