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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뜻 풀이

작성자
신영삼
작성일
2019-03-22 14:31
조회
60
디아스포라의 뜻 풀이

‘디아스포라’의 낱말의 뜻은 신약성서의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서, 각지에 <흩어진 자들, diaspora>에게 보낸 서신중에서 나오는 말입니다.(약1:1,벧전1:1) 여기에 사용 된 이 디아스포라는 위의 두 구절 외에 요한복음 7:35에만 보이는 것으로, 거의 위의 두 서신의 수신자를 가리키는 감을 주고 있으나,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의 험준한 고비를 말하고 있는 이름인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단적으로 말하여 “본국을 떠나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인들”을 지칭한 것이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창12:1-4)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은 그대로 디아스포라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을 기업의 땅으로 허락받았으나, 그곳을 떠나 애급으로 가서 400년간의 나그네의 생활을 거치었고, 그 후 가나안으로 귀환 도중에도 40년간을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北朝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 포로생활로, 南朝 유대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 포로로, 수난의 세월을 보내었던 것이다. 갈대아 지방에 흩어진 이스라엘인들은 소위 포로 7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주전 586년), 일단 모국으로 귀환하였으나, 그 일부는 그 지방에 계속 머물러 산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알렉산더대제(주전 320년 경)와 푸톨레미 1세는 대량의 유대인들을 애급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수는 신약시대에 와서 백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또한 수리아의 안티오커스대제(주전 170년 경)는 약 2,000호의 유대인들을 갈대아 지방에서 부르기아, 리디아, 등 소아시아로 이동시켰다고 하며, 로마의 폼페이 장군(주전 63년)은 예루살렘에서 포로했던 수많은 유대인을 로마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은 강제적이며, 단체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상업, 기타의 목적으로 자진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갔던 것이다.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옮겨 왔던 것과는 좋은 대조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도처에 많았다. 행2:9-11에는 이들 디아스포라의 살던 지방명이 열기되어있거니와 그중에도 소아시아지방에 유대인의 수는 더 많았던 모양이다.

금일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산재하여 설움과 냉대를 받으면서 사는 여전한 디아스포라의 민족인 것이다. 이와 같이 디아스포라는 원래 흩어진 유대인들을 지칭했으나, 이는 점차 신령한 의미로 해석하게 되었다. 즉, 성도들이 그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떠나 세상에서 사는 생애는 임시적으로 우거하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런 사상의 발전은 공동서신인 야보고서신과 베드로전서에서 볼 수 있다.

즉 야고보서에서는 이를 문자적인 뜻에서 사용하는 반면, 베드로전서에는 더 신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자는 엄격히 유대색체로서 그 수신자가 문자대로 흩어진 유대인들인 것을 말하는 반면에, 후자의 수신자는 주로 이방인들이었다. ‘나그네’란 베드로전서의 중심사상의 하나로서, 그것은 성도들의 지상생애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겠다. 하였튼, 디아스포라에게는 언제나 박해와 냉대가 따라 다니는 법이었다.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 역시 살기 어렵던 조국강산을 떠나 세계 각 곳으로 생존을 위해서 흩어져 살아 온 그간의 시공(時空)이었다. 문화적 충격과 인종차별 속에서 멸시, 냉대를 받으면서 산 그간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친정'인 조국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우리들 제1세대는 지난날의 아픔을 달래면서, 망향의 그리움에 살고 있는실존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 성도(聖徒)들은 그 어디에 살고 있던지 간에,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을 그리면서, 우리들 삶의 종말이 오는 그 순간까지, 믿음에 굳게 서면서, 동시 우리를 낳아 잔뼈가 굶게 해준 모국에 대한 감사와 한 핏줄을 이어 받은 배달민족의 긍지와 형제애로 뭉쳐서, 신앙과 성실 그리고 아름다움 및 그리움으로 점철되는 남아있는 여생이, 이 "디아스포라 세계 한인 공동체" 카페를 통해서 더욱 보람되고, ‘유종의 미’가 되었으면 한다.


1. 개요[편집]


고전 그리스어로 파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2. 역사적 사례[편집]


2.1. 유대인[편집]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계기.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로 인하여 중동 전역에 생겨난 유대인 집단이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으며, 이후로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재정착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이주를 반복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디아스포라는 서기 132년에 일어났는데,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이 진압된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국외로 이주하게 된다.[1]
[2]


2.2. 아시아[편집]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이다. 명나라 시기부터 이미 많은 한족들이 동남아 일대로 이주해갔으며, 19세기 이후 청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이민은 급속도로 가속됐다. 당시 중국을 떠난 한족들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중 상당수가 미대륙 횡단철도 건설을 비롯한 일용직 노동자에 종사했기 때문에 이들을 일컬는 쿨리(苦力, coolies)라는 차별적 용어가 유행하기도 했다.[3] 비슷한 시기 인도인들 역시 먹고 살길을 찾아 미국 및 남아공 일대로 대거 이주를 해나갔는데, 속어로 데시(Desi)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수는 약 250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한국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 사이에 상당한 규모의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조선 말기의 혼란을 피해 1860년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해주와 만주 일대로 이주하였다.[4]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를 가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어났는데, 일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 연평균 대략 1만명이 국외 이주를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일본의 해외 침략 등에 동원되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서, 1945년 해방 당시의 통계를 보자면 공식적으로만 일본에 약 110만명, 만주 일대에 120만명이 이주한 것으로 드러난다.[5]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미국으로의 이주가 주를 이루었는데, 1965년 미국 당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직계 가족들의 경우 제한없이 초청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 배경.


2.3. 유럽[편집]


디아스포라의 어원이 고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부터 잦은 대규모 이주가 행해졌다. 폴리스를 생활단위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럽 전역에 진출하여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고, 이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대도시로 생존해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나,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타란토 등이 대표적인 사례. 또한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과 대제국 건설 이후로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에 식민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대표적인 사례.[6] 덧붙여서 게르만족의 대이동도 디아스포라에 해당한다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중세에는 봉건제의 특성상 고대만큼 잦은 이주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한 기독교도 집단들의 중동 이주나 유럽 남부에서부터 아메리카까지 사실상 당대 전세계를 누빈 바이킹 혹은 동방식민운동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로 유럽에서의 대규모 이주는 다시 시작된다. 유럽 각국에서 미대륙 내의 식민지 개발에 나서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 유럽 전역을 뒤흔든 종교개혁과 맞물려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기 때문.
한편 신생 미합중국의 경제적 발전이 본격화된 19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경제적 동기와 기술적 발달[7]이 결합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이동이 이루어진다. 독일에서만 1840년부터 1870년까지의 약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공식적으로만 240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8], 아일랜드에서도 대기근을 피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의 이주를 택한다.[9] 19세기 후반부터는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이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일대에서의 대규모 북미 이주가 이루어진다.


2.4. 아프리카[편집]


자발적 동기로 이루어진 다른 지역에서의 이주와 달리, 아프리카의 디아스포라는 인신매매의 성격이 아주 짙다. 16~19세기 사이의 약 4세기동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천만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전세계 곳곳에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상당수는 미주대륙으로 끌려갔다.

[1] 다만 한국에서는 그전까지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서만 살고 있다가 강제로 쫓겨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미 그 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집트나 소아시아 일대로 이주를 해간 상황이었다. 애초에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500년간 이어졌던 헬레니즘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사해동포주의로 가득 차있어서 국외 이주를 그렇게 꺼려하는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미개발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보다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게 먹고 살기에 유리했다.[2] 중요한 점은 예루살렘의 제외한 다른 팔레스타인 지방을 포함한 로마의 전 지역은 유대인 거주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거주가 금지된 것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 뿐이었다[3] 다만 쿨리라는 단어 자체가 중국인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유럽 및 미주에서 육체 노동직에 종사하는 황인종이면 다 쿨리라고 불렸다. 심지어 혈통적으로 백인들과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는 인도인들도 쿨리라고 까였다.[4] 20세기 초반부터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로의 이주도 시작되었지만, 이 시기 주된 이민지는 만주와 연해주일대였다.[5] 이 중 일본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해방과 동시에 귀국하지만, 만주에 이주한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절반 이상이 현지에 머무른다.

일본과 만주 이주민 사이의 차이점(징용으로 인한 강제 이주 vs 경제적 목적으로 인한 자발적 이주 / 1945년을 기준으로 30년 안팎의 짧은 이민의 역사 vs 90년 가까이 된 오랜 이민의 역사)이 드러나는 지점.[6] 사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독보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제국 전역에 무수히 많았다.[7] 증기선과 같은 당시로는 신식 교통이 개발되면서 해외 이주가 훨씬 쉬워졌다.[8] 1865년 당시 독일 연방의 공식 인구가 3500만 명 정도였다. 인구의 7~8%가 빠져나갔던 것.[9] 대기근 직전 아일랜드의 인구수가 850만명 정도였는데, 대기근 직후 400만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2세기 가까이가 지난 지금도 인구수가 60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3분의 1은 굶어 죽고 3분의 1은 미국으로 가고 보니 3분의 1만 남았다.라는 블랙유머까지 있을 정도